거듭난 사람(요 3:1-10)
1.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가서 대담을 나누는 장면.
그는 바리새인, 유대인의 지도자.
바리새인= 율법주의자로서 경건한 종교인. 예수님과 대립이 심했지만, 존경받는 종교인. 바울은 자기를 바리새인으로 소개하면서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것이 하나의 자랑거리였다고 말했다.
유대인의 지도자= 산헤드린 공회원. 산헤드린은 유대인들의 정치, 종교, 사회, 문화의 최고 기관. 로마의 총독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로마는 유대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고 어느 정도 자치를 보장. 그러므로 산헤드린은 대단히 높은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장차 예수님을 1차적으로 재판하기도 하였다.
2. 그가 밤에 예수께 왔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소문을 두려워함. 자기는 존경받는 지체 높은 사람, 예수님은 당시에 떠돌이 랍비. 곧 유대의 상류사회에서 인정하지 않았음. 그러므로 자기같은 사회적 명사가 한창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곧 구설수에 휩싸여 있는 갈릴리 청년을 찾아갔다는 소문이 나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
그럼에도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데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음. 그게 무엇? 그가 한 질문을 보면 알 수 있다.
3.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랍비라 불렀다. 선생님. 자신이 유대인의 지도자로서 상류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매우 열린 사고방식의 소유자임을 보여줌. 그는 편견 없이 예수님을 대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사람.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안다고 고백하였다. 이것은 보통 고백이 아님. 우리라고 하였으므로 자기뿐만 아니라 그렇게 아는 사람이 자기 주위에 또 있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니고데모와 또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으로 인정하게 된 이유는 그 다음 말에 있다. 곧,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예수께서 표적을 행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은 니고데모 같이 지성적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한 종교적인 편견에서 자유로운 사람. 자기가 속한 상류사회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는 인정했다. 그가 마음이 좋은 사람이라서 인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매우 합리적으로 그렇게 했다. 곧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니, 그 표적이 바로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사람으로 증언하고 있었던 것.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을 예수께서 하셨다는 것을 그는 인정한 것.
예수님은 이미 많은 표적을 행하셨다. 이 표적은 그저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기적이다. 요한복음 본문의 앞부분에 충분히 기술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예루살렘에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고, 그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니고데모가 그것을 직접 목격했는지, 아니면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표적 행하신 사실을 곰곰이 생각했던 것임이 틀림없다. 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했다. 이 점이 니고데모의 훌륭한 점이라고 우리는 말해야 할 것. 산헤드린의 공회원 쯤 되면 갈릴리 나사렛이란 시골 사람인 예수님이 무슨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무시하기 쉽다.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그런 사람 인정도 하기 싫다는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이 이방인 로마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가는 현실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며 민족의 장래에 대하여 많은 염려를 하며 기도하며 지냈던 것 같다. 특히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자기 백성을 돌아볼 것인지 생각하고 기도했을 것. 그러다가 예수 소문을 듣고,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랍비를 통해서 무언가 큰일을 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것.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면 이제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으로부터 듣고자 한 것, 알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다.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기다린 것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언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로마인들을 몰아내고 유대가 독립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유대 땅에 세워지고,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온 세상의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 언제일까, 그것이 유대의 지성인들의 공통되는 질문이었다. 니고데모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으로 여겨지는 예수로부터 바로 그것을 듣고 싶었던 것. 그러면 예수님은 이런 니고데모에게 무어라 대답하셨나?
4.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그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씀을 하셨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듭나지 않으면 그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대답하신 것.
니고데모가 알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거듭나는 것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는 말씀. 먼저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위하여 먼저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 그래서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라고 두 번 반복하여 말씀하셨다. 진실로 라는 말은 아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실 때 “아멘 아멘” 하고 두 번 말씀하시는 습관이 있으셨다.
사람이 거듭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멘 아멘 하신 후 그것을 말씀하신 것.
그런데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거듭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물었다.
5.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4)
거듭난다는 말은 문자대로라면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하고 니고데모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장성한 사람이 더구나 늙으면 어떻게 두 번째 날 수 있다는 뜻인가?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라는 뜻인가? 그런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도대체 거듭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니고데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이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가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무식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도대체 이해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사건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는 마치 개그 콘서트에나 나올 법한 우스꽝스러운 대화로 이어졌다. 니고데모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자 예수께서 좀 더 자세하게 그리고 길게 설명해 주셨다.
6.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예수님은 여기서 다시 진실로, 진실로, 곧 아멘 아멘을 말씀하셨다. 대단히 중요하니까 반드시 잘 들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도 그렇게 잘 들어야 하겠다. 그것이 무엇?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거듭난다는 말을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바꾸어 말씀하셨다. 거듭난다는 말을 니고데모가 알아듣지 못했으므로 그것을 설명한 것이 바로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말은 물 곧 성령으로 난다는 뜻이다. 물은 성령을 설명하는 하나의 상징. 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성령이라는 뜻이라고 보면 된다. 육신적으로 아이가 태어날 때는 물로서 나는 것이다. 아이가 엄마의 양수에서 살고 있다가 거기로부터 태어나는 것처럼, 곧 물이 아이를 태어나게 만드는 것처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 거듭남이라는 뜻이다. 물과 성령으로, 곧 물과 같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데 비하여 여기서는 거기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은 바깥에서 본다는 것, 혹은 안다는 뜻이라 한다면, 들어간다는 것은 그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뜻이다. 좀더 진전된 상태를 가리킨다. 거듭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도 없고,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 곧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도 없다는 말씀이다.
여기까지에서 우리는 거듭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참된 신자, 진짜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사람이다. 니고데모는 나이가 얼마나 됐을지 정확히 알 수야 없지만, 유대인의 지도자 곧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었으니 한 50은 되었을 것이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써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를 바랐고,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했다. 유대인의 시각으로 그는 훌륭한 신앙인이었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 그는 아직 거듭나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그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외면적으로 모범적으로 했다 하더라도 그는 아직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알지도 못하고 더욱이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거기에 들어가려면 어떤 일이 있어야 할까요? 바로 거듭남이다.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이 말씀은 니고데모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니고데모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안 믿는 불신자에게 보다는 믿는다고 생각하는 교인들, 곧 교회 춣석 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다. 교인이라고 해서 다 거듭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인이 되면 거듭나야 하지만, 아직 거듭남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을 수 있다. 거듭나야만 진짜 그리스도인이다. 거듭나야만 예수님을 참으로 믿을 수 있다. 믿어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으로써 믿게 되는 것이다. 거듭남 없이 믿는 것은 구원을 얻을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인간적인 차원의 믿음일 뿐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은 거듭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 어떻게 거듭나게 되는가?
본문에 의하면 물과 같은 성령으로 되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고 우리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이나 지성이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여기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란 거듭난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거듭난 자 곧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에 의하여 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혈통으로 난다면, 부모가 거듭난 자라면 자녀도 거듭난 자가 될 것인데, 그게 아니라고 하였다. 그 다음에 나오는 육정과 사람의 뜻은 인간의 감정이나 의지로 해석할 수 있다. 즉 거듭나는 것은 거듭나고 싶다거나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거듭남은 하나님께로부터 남으로써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게 해 주심으로 된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나게 하심으로서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우리로서는 기도하고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
거듭남의 진리에 대해서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비교법으로 설명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이로써 거듭남은 육적으로 나는 것을 가리키지 않고 영적으로 난 것을 가리킨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사람은 모두 육적으로 태어나 이 세상을 산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소수의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은 영으로 다시 나는 은총을 입는다. 육으로 태어난 것이 실제 사건이듯이 영으로 거듭나는 것도 실제 사건이다. 이것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말이 아니라 실제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 사람이 부모로부터 육적으로 태어나야 그 부모의 자녀이듯이 하나님의 자녀도 마찬가지다. 그냥 하나님의 자녀라고 우긴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야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우리는 육으로 한 번 태어나고,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 결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거듭남의 진리를 듣고 놀라고 있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7-8)
거듭남의 진리는 놀랄 일이 아니다. 놀라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마땅히 거듭나야 하고, 거듭난 경험이 있어야만 진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만약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 하더라도 거듭남이 없다면 그는 아직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옛날에 우리나라 부잣집에는 많은 사람이 함께 살며 숙식을 같이 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자녀도 있고 머슴도 있었다. 자녀와 머슴이 한 집에 살고 함께 식사를 하지만 자녀는 자녀이고 머슴은 머슴이다. 자녀가 머슴이 될 수도 없고, 머슴이 자녀가 될 수도 없다. 자녀는 그 집에 영원히 머물며 부모가 돌아가시면 유산을 물려받는다. 그러나 머슴은 그 집에서 일하고 삯을 받고 살다가 시간이 지나면 그 집을 떠나야 한다. 주인이 별세해도 유산을 받지 못한다. 한 집에 있어도 사실은 천지차이가 있는 것이다. 교인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출석을 해도 다 같은 교인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진짜 하나님의 자녀이고, 다른 사람은 그저 머슴에 불과하다. 거듭나야만 진짜 그리스도인이고, 영생을 얻고,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거듭남이 없다면, 평생 교회생활하고 평생 신앙생활하다가 죽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가게 된다. 얼마나 불쌍한 인생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거듭남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상세히 설명을 해 주셔도 니고데모는 아직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듣지 못했으면 가만히라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모르는 것을 묻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그 성격 탓에 또 질문했다.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 그로서는 불가능한 일,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던 것. 그에게는 거듭난다는 것이 그저 구름잡는 것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이처럼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거듭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 영적인 세계, 하나님나라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어도, 이해하지 못한다. 실컷 듣고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 어디 있노, 라고 말이다. 니고데모가 바로 그러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침내 따끔하게 질책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10) 이스라엘의 선생이란 양반이 이렇게 무식하냐는 뜻이다. 니고데모는 당대의 엘리트에 속하는 사람이었지만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무식한 사람에 불과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알 것은 웬만큼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무식하기 짝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세상을 아는 것과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아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유식하더라도 영적으로는 무식한 사람이 많고, 세상에서는 비록 배우고 아는 것이 적다 하더라도, 영적으로는 얼마든지 유식할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은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모두 갈릴리의 어부들이었다.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예루살렘의 랍비학교 문 앞에도 못 가본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대학자들,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무식하다고 멸시를 당했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그들만한 대가들이 없다. 예수님으로부터 3년을 배우고,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으로부터 계속 배우고 나니 세상에서 그들만큼 영적으로 유식한 사람들은 이제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책을 썼는데,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와 후서를 써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고,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 3편을 썼을 뿐 아니라, 성경 중에서 가장 심오한 책이요 성경전체의 완성의 책인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것이다.
이 세상과 영적 세계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일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는 비록 아는 것이 적을지라도 영적으로는 유식해야 한다. 세상 지식이 많은 것은 별로 자랑거리가 못 된다. 영적 지식이야 말로 진짜 지식이다. 영적 지식은 거듭남으로부터 출발한다. 거듭나지 않으면 영적 지식은 0점에 불과하다. 거듭남은 영적 세계의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거듭난 사람인지를 확실히 확인해야 한다. 만약 거듭나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하나님께 죽자코 매달려 거듭남의 은총을 입어야 한다. 내가 거듭났는지 안 났는지 어떻게 아는지에 대해서는 최소한 세 가지를 말할 수 있다.
7. 첫째, 거듭난 사람의 하나의 특징은 기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는 것.
기도는 거듭난 사람의 영적 호흡이다.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거듭난 사람은 기도함으로써 영적인 숨을 쉰다. 기도하지 않으면 마치 숨을 쉴 수 없는 것처럼 답답해서 견디지 못하게 된다. 하루 종일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영적인 답답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아마 거듭나지 않았을 것이다. 답답함을 느낄 때 기도하면 마치 맑은 공기를 마시듯 마음 깊은 곳에서 영혼의 자유를 느끼게 된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거듭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숨 쉬는 것이 자연스럽고 맑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면 몸이 상쾌해지듯이 거듭난 사람은 기도하면 할수록 더욱더 기도하고 싶어진다. 기도하는 시간이 즐겁고 그래서 더욱더 깊은 기도를 하고 싶어진다. 기도는 영혼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만나 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생생한 생명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8. 둘째, 거듭난 사람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도가 영적 호흡이듯이 말씀은 영적 양식. 밥을 먹어야 힘을 쓸 수 있는 것처럼 말씀을 섭취해야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거듭난 사람은 말씀을 섭취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허기를 느껴서 말씀에 갈급하게 된다. 육신이 끼니때가 되면 밥을 찾듯이 거듭난 영혼도 정기적으로 말씀의 밥을 찾게 된다. 몇 일 동안 굶어도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면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지 않고 몇 날을 지내도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마 거듭난 사람이 아닐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된다.
말씀에 갈급해 하는 거듭난 사람의 모습에 대해 아모스선지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갈증을 느끼는 사람, 굶주림을 느끼는 사람이 참으로 거듭난 사람이다.
9. 셋째, 거듭난 사람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반드시 무언가를 사랑하게 되어 있는데, 문제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을 사랑한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한다. 요한 일서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15-16) 세상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하고 그래서 세상을 떠나기를 두려워한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한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 했다. 곧 재물과 향략과 권력과 명예를 사랑한다. 그러나 거듭나게 되면 사랑의 대상이 바뀐다. 하루 아침에 갑자기 바뀌지 않더라도 서서히 바뀌게 된다. 세상 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게 되고, 세상에 있는 것들보다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참된 그리스도인과 가짜 그리스도인들을 그가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보고 분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러나 가짜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사랑만 있다고 하였다. 하나님 사랑과 자기사랑. 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은 다 자기사랑의 발로이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원죄이고 죄라는 것이다.
선악과 사건을 가만히 살펴보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분석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게 되어 있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귀가 찾아와서는 선악과를 따먹게 했다. 선악과를 먹으면 사람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다고 속삭였던 것.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에 혹한 사람은 그만 선악과를 먹게 된다. 이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위한 존재로 살아가게 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목적으로 살게 된 것.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는 것조차도 자기 사랑을 위해서 하게 되었다.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짜 신앙이 아니다. 이것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참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이제는 자기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하여 자기는 고난도 당하고 희생도 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버린다. 거듭난 사람의 삶은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으로 변하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거듭났는지를 아는 시금석이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보면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으면 죽었다 깨도 결국 사랑하는 것은 자기 한 몸인 것이다. 자기를 위하여 다른 사람도 사랑하는척하고, 자기를 위하여 교회도 다니고,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도 믿는척하는 것이다. 아무리 외면적으로 그렇게 하더라도 내면적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며, 진정한 믿음도 없고, 의로움도 없고, 거룩함도 없으며, 영원한 생명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오직 거듭남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명심. 우리와 우리 자신이 무엇보다 거듭난 참된 그리스도인인 것을 확인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이 내 아들 내 딸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자.
2014: 밀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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