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삶(살전 5:16-18)
10월 31일은 종교개혁기념일.
1517년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게시함으로써 역사적인 종교개혁운동이 시작되었으니까, 올해는 496년째 되는 기념일이고, 앞으로 4년 후인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
종교개혁을 통해서 로마교회와 분리된 후 500년 가까이 흘렀는데, 현재 개신교는 로마교회와 팽팽한 세력 대결을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루터나 칼뱅이 적그리스도의 집단이라고 불렀던 로마교회가 아직도 무너지기는 커녕 세력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 것은 정직하고 단순한 머리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현상이다.
종교개혁은 로마교회가 성경의 진리를 상실하고 세속화되었기 때문에, 성경의 진리를 회복하여 바른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일어난 운동이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를 소리높이 부르짖음으로 성경적 진리를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이 중에서 오늘은 오직 은혜라는 구호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오직 은혜의 가장 일차적인 의미는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고,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직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직 은혜에 근거하여 사는 삶이어야 한다. 은혜로 사는 삶이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이전과는 다른 삶의 원리를 알게 되고, 그 원리에 따라 살 수 있게 된다.
은혜로 사는 삶의 반대는 율법으로 사는 삶이다. 율법의 삶은 자기의 노력으로 죄용서를 받고 인정을 받고 구원을 얻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사는 삶을 가리킨다. 그래서 율법의 삶은 공을 세우고 업적을 세움으로써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고자 하는 목적으로 사는 것이다. 율법으로 사는 사람은 모든 것이 자기의 노력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알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삶이 바로 율법으로 사는 삶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율법적인 삶이 아니라 은혜의 삶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은혜로 산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율법적인 삶을 살 경우가 많다. 내가 은혜로 사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금방 알 수 있는 표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런데 오늘 말씀이 바로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의 본문에서 은혜로 사는 삶의 대표적인 표지로 3가지로 말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은혜로 살고 있다면 항상 기뻐할 것이고, 쉬지 않고 기도할 것이고, 그리고 범사에 감사할 것이다. 만약 기쁨도 없고, 기도도 안 하고, 감사생활도 안 하고 살고 있다면, 우리는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뭔지 모르지만 율법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이제 이 3가지에 대하여 각각 살펴보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은혜로 사는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첫째, 은혜로 사는 삶의 첫째 증거는 항상 기뻐하는 것이다.
기쁨에 관하여 가장 주목할 만한 말씀이 두 개 있다. 하나는 구약성경 하박국 3장 17-18절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이 사람의 처지를 한번 생각해 보자. 그는 열심히 일을 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 등, 과수원이 완전히 흉작. 밭에 먹을 것이 있는가? 없다고 하였다. 요즘 배추값이 폭락했다고 하는데, 이 사람의 채소 농사도 완전 실패했다. 우리에 양도, 외양간에 소도 없다. 목축도 실패.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다. 내 인생은 완전 실패야 하고 말할 만한 상황.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고, 가족들도 한심하다고 외면할 수 있는 상황. 친구도 다 떠나고, 요즘으로 하면 노숙자 신세를 면치 못할 정도가 되었다. 이런 사람이 기뻐할 수 있을까?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기뻐하지 못할 것. 그런데 그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어떻게 무엇 때문에 기뻐했는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
우리는 이 사람의 마음에 있는 기쁨의 비밀을 잘 관찰할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가 볼 때 이 사람은 참으로 은혜를 아는 사람. 이 사람은 사업의 성공이나 실패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닐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사업, 잘 되고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이야 인지상정. 당연한 일. 그러나 실패했다고 해서 그렇게 낙담할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왜? 사업과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이미 받았기 때문. 그 은혜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구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는데, 사업 좀 실패했기로서니 그게 뭐 그리 대수겠느냐 라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 중에 이렇게 할 만한 분이 얼마나 되겠나? 사업에 실패한 정도가 아니라, 아이가 학교에서 시험만 좀 잘못쳐도 큰 일이나 생긴 것처럼 낙심하지 않는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열심히 수고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햇빛을 거저 주셨고, 빗물도 거저 주시고, 숨쉬는 데 필요한 공기도 거저 주셨다. 이런 것은 하나라도 없으면 우리는 곧 죽고 만다. 그렇게 중요한 것을 하나님은 공짜로 주셨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우리에게 거동할 수 있는 몸도 주시고, 함께 살아갈 가족도 주셨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알고 믿을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믿음으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이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곰곰이 생각하면 하박국 선지자의 말처럼,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되는 일 없이도 즐거워하고 기뻐하기에 충분한 것.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기쁘지 않고 즐겁지 않다면, 무슨 이유를 대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잊어먹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은혜로 살지 않고 다른 무언가로 살고 있는 증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서 지금 기쁘지 않다면, 즐겁게 사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은혜를 까먹고 있구나, 내가 하나님을 잊어먹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고 회개해야 할 것.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 감옥에 갇혀 죄수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기쁘고 즐거웠다. 그는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감옥에 갇히 죄수와 감옥 밖에서 자유롭게 사는 사람과 비교하면 누가 더 기뻐해야 하는가? 당연히 자유의 삶을 사는 사람들일 것. 그러나 바울은 감옥에서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 감옥에 있는 나도 기쁜데, 감옥에도 안 온 여러분들이여 얼마나 좋은가? 그러니 딴 생각하지 말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
기쁨 없이 사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즉시 자기 마음을 살펴서 기쁨이 있는지 없는지, 점검하고, 항상 기뻐하는 삶, 은혜로 사는 삶을 회복하게 되기를 바란다.
은혜로 사는 삶의 둘째 증거는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다.
사람이 기도하는 것은 은혜 받기를 원하기 때문이고,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은 은혜를 사모하기 때문이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미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고, 그래서 더욱 더 은혜 안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하는 시간에 공부 좀 더하고, 기도하는 시간에 일 좀 더하고, 기도하는 시간에 사람들을 만나서 로비를 좀 더하고, 뭐 이렇게 산다. 기도는 시간 낭비라 생각하고, 기껏해야 스스로 마음을 정리하여 평안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므로 은혜를 맛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예배 시간에 기도를 형식적으로 잠깐 할지는 몰라도,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결코 하지 못한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은혜로 사는 삶의 하나의 특징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않겠다(삼상 12:23)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계속 머무르기 위해서는 기도가 없으면 안 된다고 보았다. 누군가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계속 기도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자기의 몫이라고 느꼈던 것.
기도한다는 것은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이다. 기도를 쉬는 순간 은혜에서 멀어진다. 기도하면 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속으로 복귀할 수 있다. 은혜 안에 계속 머무르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 은혜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고도 태연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힘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증거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다. 예수님은 열심히 기도에 전심전력을 하고 계셨지만 제자들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깨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우리는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으면 곧 시험에 들게 된다. 시험에 들게 하는 자는 마귀다. 마귀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때를 호시탐탐 노린다. 기도하지 않으면 반드시 시험에 들 수밖에 없다. 베드로의 실족이 바로 기도하지 않고 졸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호언장담했었다. 다른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자기는 그러지 않겠다고,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말을 한 지 1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다. 시험에 넘어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그를 위해서 이미 기도하셨다. 눅 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가 실족할 줄을 아셨다. 그러나 그가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셨고, 그 결과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 안에 머물 수 있었다.
만약 기도를 게을리 하고 있다면 그것은 은혜로 살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나의 기도 생활은, 내가 무엇으로 살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은혜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율법으로 살고 있는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모든 것은 내 하기에 달렸다고 생각하며 자기 힘을 믿고 살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거울과 같다. 은혜로 사는 삶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이다.
은혜로 사는 삶의 셋째 증거는 감사하는 생활이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이루어 놓은 일에 대해서는 자랑할 뿐 감사하지 않는다. 내가 이런 일을 했어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서까지도 하나님, 내가 이번에 이렇게 대단한 일을 했습니다 하고 자랑하기를 서슴치 않는다. 이런 사람은 아직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고백이다.
회사에서 한 달 동안 일하고 봉급을 받을 때, 어떤 사람은 감사하고, 다른 사람은 감사하지 않는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내가 수고했으니까 봉급 받는 것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감사할 일이 없다. 감사한다면 수고한 자기자신에게 감사할 뿐이다. 그러면 감사하는 사람은 왜 감사할까? 그는 자기가 수고를 하기는 했지만 봉급 받기에는 자기 수고가 미약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금밖에 수고한 것이 없는데, 사장이 이렇게 큰 액수로 봉급을 주니 감사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만족한 삶, 행복한 삶을 살아갈지는 뻔한 일일 것이다.
은혜를 아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감사를 잘하는 것이다. 감사는 은혜로 사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바로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사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적합한 감사를 하지 않는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결코 은혜의 삶을 살 수 없다.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중에 참 섭섭하게 여기신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은혜 입은 자들이 제대로 감사할 줄 모를 때였다. 한번은 예수께서 10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일이 있었다. 그런데 10명 중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의 예를 올렸다.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눅 17:17-18)
예수님은 사례를 받지 못하여 섭섭하신 것도 있었겠지만, 그 보다는 감사할 줄 모르는 9명의 유대인들의 앞으로의 삶이 안타까우셨던 것. 그렇게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른다면 어떻게 구원받기에 합당한 인생이 될 수 있겠느냐고 여기신 것. 하나님은 그렇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실 생각은 없으실 것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받은 은혜가 당연한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것. 은혜를 못 받을 수도 있었는데, 받았으니 감사한 것이다. 은혜를 받고도 감사하지 않는 것을 배은망덕이라고 한다. 배은망덕한 사람은 더 이상 좋은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다.
제가 학생들을 상대하다 보니 신학생 중에도 크게 두 가지 종류의 학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은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제대로 된 감사를 하지 않는 학생이고, 다른 하나는 작은 은혜도 크게 여기고 감사하는 학생이다. 교수라면 당연히 감사를 잘하는 학생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그렇지 않은 학생은 마음에서 잊어버리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배은망덕한 사람들에게서는 별로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다. 범사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도 감사하고, 사람의 일에도 감사한다는 뜻이다. 우리 눈에 좋은 일에도 감사하고 우리 눈에 안 좋게 보이는 일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 사람이 베푼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도 감사를 잘한다. 그러나 사람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기 쉽다.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감사하는 것이 몸에 배인 사람, 감사하는 것이 체질이 된 사람,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인다운, 은혜로 사는 사람이다.
말씀을 정리.
은혜로 사는 사람,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은 반드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며 살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내가 은혜로 사는지 그렇지 않은지 점검할 수 있는 시금석이다. 이런 시금석을 통하여 내가 은혜 안에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 늘 점검하면서, 은혜에 굳게 붙어 있는 밀알 가족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2013: 밀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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