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나와 남(눅 10:25-37)

경회성 2013. 1. 28. 16:01

나와 남(눅 10:25-37)

 

찬송: 218, 216

 

아리스토텔레스는 서구철학의 발상지인 고대 그리스의 3대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를 제외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독교 신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분들인데, 플라톤은 기독교 최고의 신학자로 일컬어지는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철학적 토대를 제공해 준 인물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로마가톨릭 최대의 신학자로 일컬어지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의 철학적 토대를 제공해 준 인물이다. 우리가 만약 시간이 난다면 이런 인물들의 사상을 공부하면 좋겠고, 그러면 우리의 삶이 훨씬 더 풍성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이 무엇이며 어떻게 행복에 이르는가를 깊이 성찰한 다음에 행복론을 썼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첫째, 사람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유일한 답변은 행복이다. 돈이 목적이 될 수도 있으나 그것은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라고 변증하였고, 쾌락도, 명예도, 권력도 다 아니라는 것.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

 

둘째, 행복은 어떤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가질 수는 없다는 것. 그래서 행복을 얻으려고 하면 반드시 불행해진다는 것. 행복이 실체가 아니라는 것은 행복이 돈과 같이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나에게 행복을 주세요 라고 기도하면 반드시 불행해지고 만다는 역설이 적용된다. 그 이유는 행복을 주세요 하는 순간에 행복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 다시 말하면 가질 수 없는 것을 주세요 라고 했기 때문에 얻지 못하게 되고, 얻지 못하므로 불행하게 되는 것. 행복은 주고 받는 것이 아님. 그것은 명사형이 아니라 동사형이다. 다시 말해서 행복은 행복하게 사는 데 있다. 하나의 삶이라는 것.

 

셋째, 그렇다면 행복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 그 답은 인간다운 삶. 그런데 인간은 신의 모사이므로, 곧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인간다운 삶이란 신을 닮은 삶이고, 그래서 신처럼 사는 삶을 가리킨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성경이 가르치는 행복에 거의 근접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의 행복론은 상당부분 성경과 일치한다. 다만 하나 아쉬운 것은 행복한 삶의 결론인 신처럼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보고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삶을 상상은 할 수 있었을지라도 그것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삶이었기 때문. 그래서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수님을 알았더라면 참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론에 꼭 일치하는 삶이었기 때문.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되신 분. 사람으로서 신처럼, 곧 하나님처럼 이 세상에서 사신 분. 그리하여 마침내 부활하심으로서 하나님으로 인정되신 분. 예수님은 참으로 신적인 삶을 사셨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았다. 곧 이 땅에 거니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삶을 사셨다.

 

예수님은 행복이 무엇인가를 잘 아시는 분이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제일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 바로 행복론이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그것을 팔복강화라고 한다. 팔복은 여덟가지 행복이라는 뜻. 팔복강화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지를 설교하셨다. 나는 오늘 팔복의 내용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제일먼저 행복에 대해서 강론하셨다는 사실로부터, 그분은 행복에 대하여 잘 아시는 분이셨음을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을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에 대하여 대단히 잘 말한 것은, 행복이란 우리가 얻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는 것, 곧 잘 사는 것이라고 한 것. 잘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다. 인간이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인지를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데, 그것을 일컬어 율법이라고 한다. 율법은 인생을 잘 사는 방법에 대한 말씀이다. 시편 1편에서 기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율법은 행복한 삶의 방법을 말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흠뻑 빠진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다는 선언인 것이다.

 

구약의 가르침, 곧 행복의 방법론을 가르친 율법을 요약하면 무엇이 되는가? 오늘의 본문 가운데서 이것이 나온다. 이제 오늘 말씀을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며 질문.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성경에서 영생은 지극한 행복을 가리킨다. 이 사람의 질문은 내가 무엇을 하면 지극한 행복, 행복 중의 행복,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무엇이라 대답?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예수님은 율법에 답이 있지 않느냐고 하신 것. 어떻게 하면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는 율법이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던 것. 너는 율법교사이니 네가 이미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네가 스스로 대답해 보아라 하셨다. 그러자 그 사람이 자신 있게 답변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자, 이것이 바로 율법의 가르침이다. 구약의 수많은 율법이 있지만 그것은 이렇게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다. 있는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것.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께서 그를 칭찬.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네가 대답한대로 그렇게 행하면 영생 곧 영원히 행복하게 살리라 라는 말씀. 참된 행복은 율법대로 사는 데 있다는 것.

 

율법의 가르침대로 살면 행복하게 된다. 율법대로 사는 것은 무엇? 하나님을 전심전력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나 자신같이 사랑하는 것. 거기에 행복이 있다. 우리는 여기까지에서 행복에 대한 충분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의 율법교사의 질문을 더 따라가 보자. 그에게는 한 가지 궁금증이 더 있었다. 그것은 도대체 내가 사랑해야 할 내 이웃이 누구냐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잘 알겠는데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잘 모르겠다는 것. 그래서 질문한 것. 내 이웃이 누구인가? 그러자 예수께서 잠시 생각하신 다음에 한 예화를 들려 주셨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가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고는 버리고 갔다. 그 사람은 피를 흘리며 길가에 쓰러져 있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았다. 제사장은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못본척 하고 피하여 지나갔다. 다음에 한 레위인이 그 길에서 이 사람을 보았다. 그도 피하여 그냥 지나갔다. 다음에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보았다. 그는 그 강도만난 자를 불쌍히 여겼다. 피흘리며 쓰러져 있는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갔다.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붕대로 싸매고 자기 낙타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갔다. 밤새도록 그를 간호해 주었다.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이 사람을 내 대신 잘 돌보아 주세요 하였다. 만약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이야기를 길게 들려주신 다음 예수님은 그 율법교사에게 질문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 사람이 답변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피했다. 그가 죽든지 살든지 나는 모르겠다는 것. 그들이 이웃 사랑의 계명을 몰랐을까? 그럴 리 없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그들은 이 강도 만난 자를 자기들이 관심을 기울일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 내 이웃은 지금 다른 데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 그러니 이 사람에 대해서는 못본 척 하고 빨리 서둘러서 내 이웃에게로 가자 한 것.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있어서 그 강도만나 죽어가는 사람은 이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면 여행하던 사마리아 사람에게 그 강도만난 자는 이웃이었나요? 맞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이웃으로 여기고 사랑했다.

 

이야기를 마친 후 예수님이 그 율법교사에게 하신 질문을 다시 한번 보자.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질문의 차이가 보인다. 율법교사는 묻기를 누가 내 이웃이냐? 하였다. 예수님은 질문하시길, 누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였다. 율법교사는 자기 중심적인 질문을 했다.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라고 말이다. 예수님은 상대편 입장에서 질문하셨다. 그 사람의 이웃은 누구인가 하고 말이다.

 

내 이웃이 누구냐가 아니라 그의 이웃은 누구인가로 바뀌었다. 내 이웃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 사람의 이웃 중에 내가 들어가느냐고 질문하신 것이다. 내 이웃이 누구냐고 나 중심으로 질문하면, 남이 문제가 된다. 남 중에서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 남을 평가하고 남을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이웃 중에 내가 포함되느냐는 질문은 나를 평가하게 된다. 내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될 만한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는 문제가 되는 것.

 

이것은 사랑의 문제이다. 남을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묻는 것은 사랑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이것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질문이다. 나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나에게 이웃이 되어 주지 않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남의 이웃인가?라고 상대편 중심으로 질문하면 나를 성찰하게 된다. 내가 그의 이웃이 되어주지 못했다면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면 나는 이웃을 자기자신같이 사랑하라고 한 율법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율법을 어기는 삶을 살고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 행복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예수님은 질문을 바꾸신 것이다. 누가 나의 이웃이냐고 질문할 것이 아니라, 내가 그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하고 말이다. 그의 이웃이 된다는 것은 그를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를 사랑한다면 율법을 행하는 것이다. 율법을 행하는 삶을 산다면 그러면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만난 자를 피함으로서 그의 이웃이 되지 못한 이유?: 두려움, 귀챦음, 바쁨. 그러나 이 모든 이유보다도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그 강도만난 자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 아무리 강도가 두렵고, 귀찮고, 바쁘더라도 그 강도 만난 자가 자기 가족이라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 왜냐하면 가족은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 그러므로 그들이 피하여 지나쳐 간 이유는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사랑하지 않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것.

 

이제 예수께서 들려주신 이 이야기에서 결론적인 질문을 해 본다. 이야기에 나오는 3사람 가운데 누가 행복한 사람일까? 제사장, 레위인 아니면 사마리아인? 답은 분명하다. 사마리아인이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다. 사마리아인은 당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으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그는 행복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었다. 그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이유는 그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으로서 그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그의 삶에서 나타나기 때문. 남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신적인 일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

 

오늘 설교의 제목은 ‘나와 남’. 이 제목 안에서 행복을 이야기 하였다. 행복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다. 하나님이나 이웃은 내가 아니라 남이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사랑하는 데에 행복이 있다.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고 파괴하는 것은 죄이다. 죄가 무엇인가? 죄는 남을 미워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를 인생의 중심에 두는 것이 죄이다. 자기가 중심이 되고 남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이 죄이다. 하나님과 남을 바깥 낭떠러지로 밀어내고 내가 중심이 되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런 인생은 불행에서 점점 더 큰 불행으로 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행복의 근원인 하나님은 남을 사랑하시는 분.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했나? 예수님은 죄인을 사랑하사 그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으로 세상을 찾아오셨다. 예수님은 일생을 남을 위해 사셨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예수님을 남을 위한 존재라고 불렀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바치셨다. 이것이 바로 신적인 삶이다. 이런 신적인 삶이 바로 행복한 삶이다.

 

나를 위해 살 것인가, 아니면 남을 위해 살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

행복은 남을 위할 때 찾아온다. 행복은 남을 사랑할 때 누리게 된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행복의 비밀이다.

남을 사랑하면 행복해진다.

 

나는 남을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라. 나는 남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 물어보자.

남을 생각하고, 남을 위해서 기도하고, 말로서 도움을 주고, 물질을 주고, 시간을 주고, 손을 건네주고, 그렇게 할 때에 행복해진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도와주는 대상이 많아지고 그 범위가 넓어질수록 더 큰 행복을 얻게 되고,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다. 참으로 큰 사람, 위대한 사람이란 큰 권력을 얻는 사람이 아니라 큰 사랑을 하는 사람이다. 대통령이 위대한 사람이 아니다. 판자집에서 살아도 남을 사랑하는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위대한 사람.

 

자기만을 아는 사람을 철이 들지 않은 사람이라고 한다. 어린이들이 그렇다. 철이 들지 않아서 자기만 안다. 나이가 들어도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인생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자기만을 아는 데서 드디어 자기 가족을 위하는 사람으로 변하여 가족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다. 흔히 말하는 철이 든 사람이다. 그러나 이 수준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하지 못하다. 더 나아가야 하기 때문.

 

가족을 사랑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자기 교회를 사랑하고, 자기 직장의 동료들을 사랑하고, 자기 마을의 주민들을 사랑하고,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마침내 온 세계를 사랑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된다면, 그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요 가장 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이셨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도우며 사는 사람이 됨으로써, 참된 행복을 알고 그 행복을 누리는 행복한 사람들이 다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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