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파가 간과한 것(딤전 1:15, 마 7:13-27)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박옥수의 기쁜소식선교회는 신구원파로 분류되는데, 비교적 역사가 깊은 권신찬 계열을 구원파라고 할때 비교적 역사가 짧다고 하여 그런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박옥수씨는 권신찬과 딕 욕이란 선교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예수교복음침례회란 이름으로 활동하다가(최삼경, <구원파란 무엇인가>(규장문화사, 1988) 지금은 기쁜소식선교회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박옥수파나 권신찬파나 이요한파는 모두 구원파에 속하는데, 그 주장하는 바가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모두 구원 문제에 집중적 관심을 기울이므로 구원파란 이름이 붙여졌다. 구원파 중에서 박옥수씨는 비교적 지성적인 사람으로써 설교에 있어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어서 따르는 사람이 많다. 기성교인들 가운데도 그의 설교에 감화를 입어 추종하는 자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는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책과 또 다른 책들을 통하여 자기의 신학을 전파하고 있는데, 이 책들의 내용은 일반 성도들로서는 그 이단성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상당히 성경적인듯한 이론을 가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박옥수파는 이단 중에서는 비교적 고급 이단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박옥수가 주장하는 바는 상당부분 성경적 근거와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아닌 듯하다. 나름대로 성경 연구를 열심히 한 흔적이 있고, 구원론 특히 칭의론을 매우 쉽게 잘 가르치는 장점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는 정통교회 목회자들도 도전을 받을 만하다. 현대의 정통교회가 설교나 교리공부시간을 통하여 구원의 진리를 잘 가르치지 않는 데 비해, 박옥수파는 구원을 집중적으로 가르쳐서 구원의 진리에 관한 한 교인들로 하여금 일가견을 갖추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런 면은 매우 좋은 면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이 성경적인 데도 있지만 확실히 비성경적인 면이 동시에 있고, 또 그것이 구원교리 및 신앙생활 전반에 현저한 낭패를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총회에서는 그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주의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그러면 박옥수파의 어떤 가르침이 문제인가?
첫째, 구원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자기들만 알고 일반 교회는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으면 소위 정통교회에 속한 기성교인들은 자기교회의 목회자들이 구원교리를 잘 모르거나 잘못 가르친다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 자기교회와 목회자들을 불신하여 교회로부터 이탈하기 쉽게 된다.
구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자기들만 알고 기존 교회는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 자체는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이것은 기존 교회를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나 있는 집단으로 생각함으로써 정통교회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단이란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분리된 집단을 가리킨다. 이들이 기존 교회를 구원의 진리를 모르는 집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개신교의 역사적 뿌리인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이 무엇인가를 생각만 해도 이들의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종교개혁운동은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진리, 특히 구원의 진리를 바로 알고, 바로 믿음으로서 기독교를 바른 구원의 진리 가운데 세우는 운동이었다. 그 운동에서 나온 중요한 명제들이 바로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다. 구원의 진리가 오직 성경에 있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철저히 연구하는 운동이었고,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고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는 것을 알고, 모든 업적주의와 행위구원사상을 배격하였다. 종교개혁운동 곧 개신교운동은 성경적 바른 구원 운동이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에 관한 결정적인 교리는 종교개혁사상 속에 다 들어있다. 지금의 구원파도 이 종교개혁운동으로 말미암은 개신교에 속하는 집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의 구원론이 무엇인지도 알아보지 않고 기존교회에는 구원의 진리가 없고, 오직 자기들만이 성경적인 구원진리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혹시 현대의 많은 개신교가 종교개혁교리에서 벗어나 있다면,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성경적 구원론을 소개하면서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해야만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케하는 바른 구원 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소위 구원파는 종교개혁자들의 기본적인 가르침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이 가르치는 일부의 진리에만 집착하고 온전케하는 나머지 구원교리를 도외시하는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적인 구원의 진리를 50%만 알고 그것만 주장하고 그것이 전부 다라고 하면서 기성교회를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구원파가 바로 알고 가르치는 50%는 무엇인가?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의 3대구호 속에 들어있는 바로 그것이다. 곧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다. 그들은 성경이 오직 은혜와 믿음을 가르친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바른 가르침이다. 현대의 기성교회가 이 기본 구원론에 등한히 하는 것은 비판을 받아 마땅한 일이다. 이 점에 관한 한 구원파는 잘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파를 쓰셔서 이 가장 중요한 구원의 기본교리를 등한히 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된 기성교회들을 회개시키고 있는 중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구원파의 문제는 나머지 50%를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구원파의 잘못 두 번째는 그리스도인은 의인이지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순간 죄용서 받고 의인으로 변했으므로 다시는 죄인으로 자기를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자기를 죄인으로 규정하면 죄용서를 받지 못한 것이고, 그래서 죄로부터 구원을 못 받은 것이므로, 더 이상 죄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힘써 강조한다. 그래서 믿는 순간 한 번 회개할 뿐 다시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기성교회가 자꾸 회개하는 것은 회개가 뭔지를 모르는 소치라고 비판한다. 이것이 구원파 교리의 결정적인 오류이다.
구원파는 회개의 개념을 50%만 알고 있다. 회개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는데, 하나는 단회적 회개라고 하는데, 곧 죄인이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사건을 가리킨다. 이것을 회심이라고 표현할 때가 많다. 마음을 바꾼다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여 죄짓는 데로 향하던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이런 의미의 회심이고 회개이다. 이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 죄에 속했던 자가 하나님께로 속하게 되는 것, 곧 주민등록을 옮기는 것과 같은 일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구원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여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죄를 짓는 본능이 우리 몸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하여 죄를 짓는 생활을 피할 수 없다. 신앙이 성장하면서 죄짓는 질과 양이 점점 줄어들겠지만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죽을 때까지 불가능하다. 이사를 가더라도 옛날 살던 동네가 그리워서 가끔씩 놀러가는 것과 같다. 이렇게 마음에 원하지 않는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마음에 죄라는 때가 끼었으므로 회개하여 씻음을 받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회개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성화를 위한 계속적 회개라고 한다. 이런 회개는 일평생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파는 회개를 회심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회개는 일생에 단 한 번 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죄를 지으면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 앞으로, 영원한 십자가의 사랑 앞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한다.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구체적으로 자백하고, 그 죄를 미워하고 버리는 결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께 돌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함으로써 그들은 구체적인 회개의 열매를 맺기가 힘든 상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예수님을 믿을 때 사람은 완전히 의인이 되는 것이고, 다시 말하면 과거와 미래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함 받았기 때문에 다시 죄를 용서해 달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이미 받은 죄용서를 스스로 부정하는 모순을 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기도문 조차도 부정한다. 주기도문에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도록 기도하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모든 죄가 처음 믿을 때에 다 용서되었는데 왜 또 용서해 달라는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기성 교회와 구원파의 교리적 차이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믿은 이후로도 죽을 때까지 계속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기존교회의 교리가 맞는가, 아니면 더 이상 죄용서를 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구원파의 교리가 맞는가? 이것을 판단하는 데 필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첫째, 죄 용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맞는가, 틀리는가? 둘째, 죄 용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죄를 안 짓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죄 용서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권면하고 있다. 구약에는 믿는 자들의 대표적인 모델인 아브라함과 다윗이 죄 용서를 위해서 기도하는 장면이 있는 등 많은 예가 있다. 그러나 구원파들의 변명을 잠재우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이후의 성경인 신약성경의 예를 들어 보자.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과 이어진 말씀들에서 용서에 관한 가르침이 나온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죄의 용서를 위해 기도할 것과, 죄의 용서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또 요한복음 20:23에서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에서도, 죄용서가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된다. 또 요한일서 1:9도 중요한 말씀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는 우리 죄를 자백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미 우리의 죄가 다 용서되었기 때문에 죄용서를 위해서 기도하면 안 된다는 구원파의 가르침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은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인 죄용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죄를 안 짓는 삶, 곧 성화를 위해서 도움이 될까 안 될까라는 문제를 보자. 죄를 안 짓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을 가지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부인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도적질하는 사람은 그것이 죄인 줄을 알고 용서를 구체적으로 구하고 그래서 다시는 도적질을 안 하겠다고 하면서 회개 기도하는 것이, 그냥 막연하게 사랑의 하나님 앞에 서는 것보다 도적질이라는 죄와 단절되는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구원파 사람들이 자주 드는 예를 따라 말한다면, 학생으로 하여금 공부 잘하게 하려면, 막연하게 공부 열심히 하도록 하는 것보다는, 그 학생이 무슨 과목을 잘 못하는지를 알고 수학이면 수학, 영어면 영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게 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죄용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나 실제적인 성화의 삶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다.
구원파는 그리스도인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이 짓는 죄에 대해서 너무 안이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의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가질 것을 강조한 나머지 죄인으로서의 심각성을 간과하도록 만든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범죄에 대하여 가볍게 다루고 만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죄에 대하여, 교회의 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책망하며 권면하고 있다. 예를들면 바울의 고린도전서의 많은 부분이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죄문제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의인이기 때문에 죄를 적게 짓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인식할 것을 성경은 촉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죄를 지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 죄는 하나님 앞에 더 심각하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죄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고전 15:34를 보자.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적게 지어야 하건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고, 성경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인물 한 사람의 예만 들어본다. 그분이 바로 사도 바울이다. 그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서신 곧 디모데전서 1:15절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여기서 괴수라는 말은 원어로 현재형이다. 내가 옛날에는 괴수였지만 지금은 개가천선하여 의인이 되었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현재 여전히 죄인 중에 가장 악한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디모데에게 편지를 쓸 때는 사도 바울의 일생 중에서 성숙한 말년이었다. 거의 성인의 반열에 오를만한 때에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게 되는데, 하나는 사도 바울 같은 성자까지도 죄의식을 느끼고 있을만큼,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누구나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인격이 성숙하면 할수록 자기 죄에 대하여 민감해진다는 사실이다. 바울 같은 분이 죄인이라면 누가 죄인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바울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했다면 누가 죄인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구원파 사람들은 자기들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고, 죄인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여기서 구원파의 세 번째 오류를 살펴본다. 그들의 교리대로 살면 죄에 점점 무감각해지고 그 결과 성화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그만큼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죄를 지으면서도 자기들은 이미 죄용서를 받은 의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결과적으로 죄를 경시하게 될 것이다. 당연히 제대로 된 회개도 안 하게 되고, 그렇게 살아가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점점 죄가 쌓이게 되고, 죄에 대해 감각이 없어지고, 성화는 아예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다. 장차 주님 앞에 설 때, 온갖 회개하지 않은 죄, 용서받지 못한 죄가 가득한 그들의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실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마태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면 좋겠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다. 사람들이 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데, 그 길은 필경 사망의 문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다고 하셨다. 곧 구원의 문은 좁은 문이다. 구원의 길이 그렇게 쉽지 않음을 가르친다. 어쩌다가 은혜로 선택을 받았으니, 이젠 안심이다, 나는 구원의 롯또에 당첨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을 그렇게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구원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우리 개신교의 문제인 것이다. 구원을 너무 쉬운 것이라, 나는 이미 얻었으니까, 이제는 놀러 다녀도 괜찮다고 생각할 만한 그런 구원은 없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이제는 됐다 하고 방심하는 순간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신 다음,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기에 틀림없는 자라고 여김받는 자 중에서 몇 종류의 사람들을 지목하며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다.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능력도 행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낸 사람들, 곧 유명한 사역자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전혀 아는 바 없다고 하시며, 천국의 문을 열어주지 않으신다 하였다. 그들이 누구인지 다시 한번 보자.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일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한 능력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겠는가, 아니겠는가? 당연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고, 교회의 집사이고, 권사이고, 장로이고, 나아가서 교회의 목사이기도 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하시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깜짝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나무와 열매 이야기를 이미 하셨다. 그 말씀은 이렇게 요약된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열매를 보면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 알 수 있다. 여기서 좋은 나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이고, 나쁜 나무는 아닌 사람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또 좋은 열매는 선행을 가리키고, 나쁜 열매는 악행, 불법임을 알 수 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 곧 구원을 얻는 것은 좋은 나무여야 한다. 그런데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 선행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선행은 그가 구원의 백성이라는 증거가 된다. 그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는 말로서 구별되지 않는다. 자기가 아무리 좋은 나무라고 주장해도 그렇게 말로만은 안 된다. 불법을 행하는 선지자들처럼 자기가 아무리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고 주장해도, 그 말로서 그가 구원을 얻고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가 하는 행실이 보여준다. 그가 선행에 속한 사람이라면 그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불법을 행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말은 거짓일 뿐이다. 그러므로 입으로 신자라 하면서 교회에 출석한다고 다 구원받을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쯤에서 종교개혁자들인 루터와 칼빈의 견해를 살펴보자. 그분들은 이신칭의론 곧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철저히 가르쳤다. 이것은 구원파와도 일치한다. 그런데 개혁자들은 예수를 믿음으로써 칭의 곧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이지 실제로 의로와지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실제로 의로와지는 성화는 칭의의 순간에서부터 죽어서 영화로워질 때까지 계속 이루어 가야할 과제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상태를 ‘의롭다함을 받은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고 표현했다. 예수 믿어도 죄인은 죄인이다. 다만 죄용서 받고, 의롭다 여김을 받은 죄인일 뿐이다. 바로 이 그리스도인의 상태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종교개혁자들의 인간론과 구원파의 인간론은 현저한 차이를 보이다. 개혁자들과 정통교회는 그리스도인을, 본질은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여김을 받는 자로 본다. 그러나 구원파는 그리스도인이 본질적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화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파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한 나머지 죄에 대하여 둔감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면 이제는 죄에 대하여 방심해도 되는 존재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다. 로마서 7장에서의 사도바울의 탄식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자기 속에 두 가지 법이 있어서 서로 싸운다고 하였다. 바로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에서의 실존을 잘 말해 준다. 우리는 천사처럼 하나님의 법을 준행하는 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불신자처럼 죄만 짓는 자도 아니다. 우리는 그 둘 사이에서 순간순간 선택하며 사는, 의롭다고 인정된 죄인인 것이다. 우리가 바울처럼 달려갈 길을 다 마치면 천국에서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쓸 것이고, 그때는 완전히 의로운 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한, 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애통한 마음으로 회개해야 하고, 주님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점점 성화되어 갈수록, 죄를 점점 더 적게 짓게 되겠지만, 불꽃 같은 주님의 눈 앞에서 우리는 죄로부터 완전히 무관한 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크든 적든 죄를 지으며 하루하루를 산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실존이다. 이 사실을 알고 항상 겸손하게, 그리고 회개하면서 살아야만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죄를 지으면서도, 나는 의인이므로 죄와는 거리가 멀어 라고 하며 자기체면을 거는 식으로 살아간다면, 죄를 짓고는 그것을 죄로서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고, 따라서 구체적으로 철저하게 회개하지 않고, 따라서 확실히 용서받지 못한 죄를 안고 죽을 때까지 사는 꼴이 되는 것이다. 죄를 지으면서도 자기 죄를 철저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 이것은 죄에 마비된 양심의 모습이다. 이렇게 되면 그의 삶은 점점 더 죄를 쌓아가는 삶이 될 것이다. 신앙양심이 마비된 가운데 죄를 점점 쌓아가는 삶을 산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구원을 체험할 수 있겠는가? “나는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라”고 사도 바울이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그만큼 죄에 대하여 민감했기 때문이다. 작은 죄도 큰 죄로 여기는 사람과 큰 죄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 때 누가 더 의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작은 죄도 큰 죄로 여기는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도 바울처럼, 날마다 자기 자신을 성찰하여 작은 죄도 크게 보고, 회개하고 용서받고 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점점 더 성화시켜 나아가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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