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시론] 위장 탈북 여간첩 사건이 깨우친 것 (퍼온 글)

경회성 2008. 8. 29. 18:32

▲ 하태경·열린북한방송 대표

 

1999년 북한의 여간첩을 소재로 상영된 영화 '쉬리'는 한국에서 245만명의 관객을 동원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극적이게도 '쉬리'가 상영될 99년에 '쉬리'를 방불케 하는 원정화라는 여간첩이 암약하고 있었다. 진짜 쉬리 원정화는 이 영화를 보았을까?

 

원정화는 보위부 공작원이 된 뒤 1998년 중국으로 파견되었다. 그녀는 중국에서 탈북자, 한국인 등 100여명을 북한으로 납치하는 데 관여했다. 이 중 한국인은 7명이라고 한다. 2001년 탈북자로 위장해 한국에 들어온 후에는 군사 기밀을 탐지했다. 100명의 군 장교 명함을 북한에 건네주고 김모 소령을 꼬여 북송을 시도했다. 황장엽 선생과 대북 정보요원의 소재 파악과 암살 지령도 받았다고 한다.

 

이번 사건은 두 가지 점에서 우리에게 큰 충격을 던져 주고 있다. 우선 북한은 미국과 테러 지원국 해제 협상을 하는 와중에서도 지속적으로 테러 기도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1996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덕근 영사를 살해했고, 1997년에는 저격수를 남파해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을 백주에 살해했다. 이번 원정화 사건에서도 보듯 북한은 중국에서 한국인을 강제 납치하고 있고 황장엽 등 요인 암살 시도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납치와 암살은 미국 법에 규정된 명백한 테러행위이다.

 

이에 한국 정부는 미국 정부에 북한의 테러 지원국 해제를 연기할 것을 요청해야 마땅하다. 북한이 이번에 확인된 납치와 암살문제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명쾌히 해명할 때까지 말이다. 현재 미국은 대북 테러 지원국 해제 문제를 핵문제와만 연계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번 여간첩 사건을 계기로 테러 지원국 해제문제는 핵문제뿐만 아니라 북한의 테러 가담 의지가 없음이 명명백백해질 때까지 유보되어야 함이 입증되었다.

 

또 하나의 충격은 햇볕정책 10년 동안 대북 안보의식이 얼마나 심각히 해이해져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군대 내의 정훈 장교는 북한과의 안보사상전쟁 최전선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일반 군인도 아니고 정훈 장교가 간첩임을 확인했으면서도 이를 묵인했다는 사실은 경악 그 자체다. 이뿐 아니다. 원정화는 2006년 11월부터 1년6개월간 일선 군부대를 돌아다니며 현역 장병을 대상으로 52차례에 걸쳐 안보 강연을 실시했다. 말이 안보 강연이지 실상은 "6·25전쟁은 미국·일본 때문"이라거나 "북핵은 체제 보장용"이라는 친북 강연을 했다고 한다. 이러니 군 내부에서 우리의 주적(主敵)은 북한 김정일 정권이 아니라 미국, 일본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번 사건을 계기로 탈북자를 수용하는 한국 정부의 자세가 소극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미국에 와 있는 쿠바 망명자들 중에도 스파이들이 끼어 있지만 미국 정부는 쿠바 망명자 수용에 소극적이지 않았다. 현 김정일 정권이 바뀌기 전까지 대남 적화전략은 포기되지 않을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든 간첩들은 내려오기 마련이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아서는 안 된다. 탈북자들은 김정일체제 이후 북한 사회 재건의 주역이 될 것이며 남북 통일의 윤활유 역할을 할 소중한 존재들이다.

 

대신 안보 교육과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이 강화되어야 한다. 원정화는 영화 '쉬리'의 여간첩처럼 장렬하게 전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녀가 한국에 온 뒤 북한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직시하면서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자수할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한국 사회의 우월성이다.

 

오히려 문제는 우리 내부에 있다. 북한의 현실을 모르고, 또 북한의 현실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 정부 아래에서 10년 살다 보니 안보의식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 바로 알기 교육을 전면적으로 재개해야 한다.

 

(조선일보 2008.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