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10월 9일 영신웹사이트 게시판에 올린 글
열왕기상 18장에는 이세벨의 남편인 아합왕이 엘리야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비난하며 죽이려 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엘리야가 아합의 우상숭배를 비판하자 많은 백성들이 아합의 정체를 알고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3장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소요죄로 몰아붙이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이 그들의 외식과 허위의식을 지적하자 분노한 그들은 로마의 권력을 빌어 예수님을 죽이고 백성들의 생각을 틀어막으려 하였다.
사도행전 24장에는 더둘로라는 변호사가 유대인 사회에 소요를 일으키는 자라고 바울을 로마 총독에게 고소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소요와 무질서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속성을 가진 권력에 기생하여 진리를 틀어막고자 한 것이다.
16세기 초 유럽에서 종교개혁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을 때, 로마 가톨릭은 권력자들과 내통하여 소요를 일으키고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라고 개혁자들과 개신교도들을 비난하며 살육하였다.
멀리 갈 것이 뭐 있는가? 우리나라 독재자들이 민주인사들을 탄압한 명분은 민중을 선동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불의가 진리를 틀어막는 방법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다 똑 같다.
그러나, 엘리야의 말처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은 엘리야가 아니라 아합과 아합의 집이었다. 그들이 진리를 버리고 우상숭배를 일삼기 때문이었다. 소요의 책임이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외면하고 틀어막고자 했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있었다.
유대인들을 소요하게 한 책임이 바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부정하는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었다. 소요를 일으키고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힌 책임은 루터와 칼빈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과 권력자들에게 있었다. 민중을 선동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힌데 대한 책임은 민주인사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재자들에게 있었다.
37년 전 단순 추락사했다던 재야민주인사 장준하선생의 유골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선생의 두개골에 6㎝ 구멍과 머리뼈 금이 발견돼 '타살 의혹'이 불거졌다. 그분의 한 아들은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 어떤 언론이 그를 인터뷰하였다.
그에 의하면, 장준하가 싸운 것은 박정희라기보다는 그 시대의 시대정신이었다. 일제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회에는 '나서지 않고 지도자에 빌붙으면 잘 살 수 있다'는 시대정신이 있는데, 장준하는 그 시대정신에 기생하는 독재자 및 사회지도자들과 싸웠다고 말했다. 지도자만 잘 따르고 줄만 잘 서면 된다 라든지, 불의를 보고 조용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는 것 등이 그 동안의 시대정신이고, 이것이 점점 더 심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율곡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은 의(義)보다 이(利)를 추구하는 시대정신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율곡의 글에는 이(利)를 돈, 명예, 그리고 편리함 등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성공, 안전, 번영, 행복 등이 아닌가? 문제는 이런 시대정신이 오늘의 한국 기독교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정신에 대하여 우리는 그리고 우리 학교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인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학교구내식당 음식과 관련한 입장들 (0) | 2013.01.09 |
---|---|
학교 당국과 학생에게 올리는 작은 글 (0) | 2013.01.09 |
인권위가 공개한 북한 정치범수용소 실태(서울신문에서 펌) (0) | 2010.01.21 |
북송(北送) 재일동포 9만명의 지옥 생활 50년 (0) | 2009.12.15 |
[시론] 위장 탈북 여간첩 사건이 깨우친 것 (퍼온 글) (0) | 2008.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