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교에 물든 기독교> 내맘대로 정리.

경회성 2013. 5. 19. 10:59

<이교에 물든 기독교>. Frank Viola & George Barna. Pagan Christianity? (2008). 이남하 역. 도서출판 대장간. 2011.

 

신약성서 전체에서 에클레시아는 언제나 장소가 아닌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신약성서에 114번 등장하는 에클레시아. (63)

 

그리스도인들은 4세기에 콘스탄틴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예배를 위해 특별한 건물들을 세우지 않았다. (64)

 

4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서서히 전면에 나선 로마 가톨릭은 이교사상과 유대교 양쪽의 종교적 관습을 많이 흡수시켰다. 로마 가톨릭은 또 전문 제사장 제도를 확립했고 신성한 건물들을 건축했다. 그리고 주의 만찬을 신비스러운 희생 제사로 둔갑시켰다. 이교도들의 방식을 따라 가톨릭은 향을 피우는 관습과 신성한 독신제도를 도입했다. 개신교인들은 주의 만찬에서 희생 제사의 개념을 빼 버렸고, 향을 피우는 것과 신성한 독신제도를 폐지했다. 그러나 그들은 제사장계급(성직자) 뿐만 아니라 신성한 건물도 그대로 유지했다.(64-65)

 

그리스도교가 태어났을 때 그것은 신성한 물건이나 신성한 사람이나 신성한 장소가 없는, 지상의 유일한 종교였다. (66)

 

그리스도인들은 15세기까지는 그들의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66)

 

2세기 말과 3세기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사람을 숭배하는 이교도의 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초점은 순교자들을 기리며 높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인들을 위한 기도가 시작되었다. (나중에 이것은 그들을 향한 기도로 발전하였다.) (67)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여 음식을 먹는 이교도들의 관습을 받아들였다. 기독교의 장례식과 장송곡은 둘 다 3세기 때 이교도들에게서 직수입되었다. (67)

 

로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의 상징으로 카타콤(지하무덤)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래서 예술이 신성한 장소와 접목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예배에 시각예술을 도입할 것을 주창한 최초의 그리스도인 중 하나였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는 십자가는 콘스탄틴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다.) (67)

 

약 2세기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도들의 유골을 거룩하고 신성한 것으로 숭상하기 시작했다... 2세기와 3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이교사상을 특징짓는 마술적 사고방식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68)

 

콘스탄틴의 생각은 미신과 이교 마술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에도 결코 태양신 섬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동전에 태양을 새겨 넣었고, 콘스탄티노플 광장에 그의 형상을 새긴 태양신상을 세웠다. (69)

 

321년에 콘스탄틴은 일요일을 법정 공휴일로 공포했다. 그가 그렇게 했던 의도는 정복되지 않은 태양신 미드라(Mithras)를 숭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요일을 태양의 날로 표현했다.)... 콘스탄틴은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 여전히 이교의 대제사장 구실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이교 제사장의 총수라는 뜻이 있는 폰티펙스 맥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이교의 타이틀을 고수했다. (15세기에 와서 이와 똑 같은 타이틀이 로마 가톨릭 교황의 영예로운 직함이 되었다.)... 콘스탄틴은 자신을 13번째 사도인 동시에 우두머리 사도로 만든 것이다. 그는 죽은 자를 숭배하는 이교 관습을 계속 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도 죽은 자 중 중요한 한 사람으로 포함되기를 원했다. (70)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제도에 역행하고 이교 문화와의 접촉을 피했다. 이 모든 것이 교회가 세상의 공공기관으로 등장해서 이교의 종교사상과 관습을 흡수하여 기독교화하기 시작했던 4세기 때 전부 다 바뀌어 버렸다... 성전의 개념을 채택했고, 신이 특별한 방법으로 특별한 장소에 존재한다는 이교사상을 흡수했다.(77)

 

오늘날 미국에서만 제도권 교회들이 소유한 부동산이 2,300억 달러가 넘는다. 교회들이 일 년 동안 십일조로 거둬들이는 500억에서 600억 달러의 18퍼센트가 교회 건물 때문에 진 빚, 유지비, 관리비로 나가 버린다...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건물 하나 없이 천하를 어지럽게 했던 사실을 너무도 쉽게 잊어버린다. 그들은 교회 건물의 도움 없이도 300년 동안 급속도로 성장했다.(93)

 

기독교 신앙이 믿는 사람들의 가정집에서 탄생했는데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 마다 이교 철학에 기초를 둔 이교에서 유래한 건물 안에 앉아 있다. (94)

 

6세기에 생겨난 가톨릭 미사는 본질적으로 이교사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교 제사장의 제목, 정결의식용 향과 성수의 사용, 예배 때 켜 놓는 촛불, 로마 바실리카의 건축 양식을 본 뜬 교회 건물, 로마법을 기초로 한 교회법, 수석감독의 칭호로 폰티펙스 막시무스, 그리고 가톨릭 미사를 위한 이교의 제사의식을 받아들였다. (106)

 

루터(다른 주요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는 1세기 교회의 원리로 돌아가자는 열망을 드러낸 적이 없다. 이 사람들은 단지 가톨릭 교회의 신학을 개혁하고자 했을 뿐이다. (109)

 

18세기 감리교인들은 개신교 예배 순서에 감정적인 측면을 제공했다. 회중이 열정적이고 활기차게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도록 권장했다. 이렇게 해서 감리교회는 오순절교회의 원조가 되었다. (117)

 

부흥운동의 신학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다루지 않았고 교회에 대해 거의 강조하지 않았다. (119)

 

설교의 진원지를 찾으려면 소피스트(궤변론자)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들은 전문적인 토론가였다.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팔기 위해 외모에 신경을 쓰고, 감정에 호소하고, 재치 있는 말을 구사하는데 능했다. 머지않아 소피스트의 스타일과 형식과 연설기술이 그들이 말하는 내용의 정확도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145)

 

그리스인들은 수사학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래서 소피스트에 대한 대우가 좋았다... 결과적으로 그리스와 로마 문화는 누군가에 의한 유창한 연설을 듣고자 하는 지칠 줄 모르는 욕구를 개발시켰다. (146)

 

많은 이교 연설가와 철학자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 결과 이교 철학사상들이 부지중에 기독교 공동체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이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 초창기에 교회의 신학자나 지도자가 되었다. 그들이 바로 교부들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다. (147)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기독교 지도자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지위의 구분을 둔 최초의 기독교 저술가였다. 그는 사역자들과 비사역자들을 구별하려고 평신도(laity)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했다... 터툴리안은 그리스도인 중에서 분리된 계층을 일컬으려고 성직자(clergy)라는 단어를 사용한 최초의 저술가였다. (171)

 

콘스탄틴이 4세기 초에 권좌를 손에 넣자마자 곧 교회는 완전한 상명하달식의 계급조직 사회가 되었다.(176)

 

칼 바르트가 정확히 지적했다: 평신도라는 말은 종교 용어 가운데서 가장 나쁜 말 중의 하나이므로, 그리스도인의 대화 속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하다.(179)

 

제임스 던(James D.G. Dunn): 성직자-평신도 전통은 대부분 다른 이단들보다 신약성서의 권위를 더 손상시켰다. (184)

 

전문적인 성직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자격증을 가진 전문가만 다룰 수 있는 구별되고 위험한 문서라는 착각을 일으키도록 조장한다.(240)

 

1세기 기독교 일꾼들이 받았던 훈련은 오늘날의 사역훈련과는 달리 학구적이지 않고 실제적이었다. 지적인 학습이 아니라 실습의 문제였다.(260)

 

오늘날의 사역훈련은 욥을 위로한답시고 찾아왔던 괴로운 세 친구의 종교적인 대화에 비유할 수 있겠다. 이성적이고, 객관적이고, 추상적인 사람들, 그것은 실제적이지도, 체험적이지도, 또는 영적이지도 않다. (261)

 

교회역사를 통틀어 네 단계의 신학교육이 있었다. 곧 감독신학(Episcopal), 수도원신학(Monastic), 대학신학(Scholastic), 그리고 신학대학원신학(Seminarian)이다. (261)

 

신학교육에 있어서 수도원단계(Monastic)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기술을 제공한 교사들이라는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이교철학자들의 사상이 기독교 신앙을 심각하게 희석시켰다. 교부들 상당수가 회심하기 전에 이교 철학자와 연설가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곧 철학적인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 (262)

 

대학신학(Scholastic)의 단계에서, 현대신학을 체계화시키는데 가장 영향력을 행사한 교수 중 한 명은 피에르 아벨라르(Peter Abelard, 1079-1142)였다. 그의 가르침은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스콜라철학자들을 준비시켜 주었다... 그는 계시된 진리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적용시켰다. 그는 신학(theology)이라는 말에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부여했다. (그 이전에는 이 말이 오직 이교신앙을 표현할 때만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벨라르, 그리고 아퀴나스는 모두 이성이 신적 진리로 가는 관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서구 대학교교육은 시작부터 이교와 기독교 요소들의 혼합물을 감싸 안았다. (264)

 

신학대학원신학(Seminarian)은 감독의 신학, 수도사의 대학, 그리고 교수의 신학이 아닌, 전문적으로 자격을 갖춘 사역자의 신학을 가르쳤다... 바르트는 신학교육이 전문연설가들의 엘리트 계층에 속해야 한다는 견해에 반대했다: 신학은 신학자들이 사적으로 예약해놓은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교수들의 사적인 관심사가 아니다... 목사들의 사적인 관심사도 아니다... 신학은 교회를 위한 것이다. (265)

 

토저(A. W. Tozer): 하나님의 생각은 영의 세계에 속하고, 사람의 생각은 지성의 세계에 속한다. 영이 지성을 껴안을 수는 있지만, 인간의 지성은 결코 영을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은 이성에 의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오직 하나님에 관해서 알 수 있을 뿐이다.(266)

 

우리가 아무리 그것을 부인한다 할지라도, 현대신학은 기독교사상과 이교철학의 혼합물이다.(268)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현대 기독교 교육의 선조이다. 신학대학원이든 성서대학이든 관계없이 현대 기독교 교육은 잘못된 나무에서 영양을 공급받고 있다. 생명나무가 아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275)

 

정식 신학교육은 학생들이 사역에서 마주칠 많은 도전에 제대로 준비시켜 주지 못한다... 높은 학위를 소지한 신학대학원 졸업생들과 성직자들이 갈등을 처리하는 능력과 뚜렷한 목적의식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신학대학원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낮은 점수를 받았다. (276)

 

우리의 신학교육은 교회의 병을 치료하려고는 하지 않고 오히려 병을 유발한 모든 비성서적인 관습들을 인정함으로써 (그리고 변호하기까지 함으로써) 그 병을 더욱 악화시켰다. (277)

 

어떤 목사의 고민: 나는 교회 안에 일어난 고장이 실제로는 신학대학원에서 배웠던 것에 기인한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우리는 배웠다! (277)

 

이스라엘의 잘못은 그들이 규례대로 하나님께 구하지 않은 것이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예배했다.(322)

 

참으로 불행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를 개인적인 추구 내지는 학문적 활동으로 변질시켜 버렸다는 사실이다. (322)

 

하나님께서 특정한 제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쓰실 수 있다고 해서 그 제도를 인정하신다는 뜻은 아니다. (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