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통전적 이해

경회성 2009. 8. 29. 19:42

<한국조직신학논총> 22집(2008.12): 107-135.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통전적 이해

최태영(영남신학대학교 교수)

I. 들어가는 말

몰트만(J. Moltmann)은 21세기 초인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의 위치에 서 있다. 그는 『희망의 신학』을 통하여 세계의 신학계에 혜성같이 등장하여 신학을 종말론적 학문으로 규정짓게 만드는데 있어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이어진 역저들을 통하여 종말론적 관점에서 신론,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에 관하여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는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그것은 신학계의 주류에서 거의 거부감 없이 수용되어 왔다. 그런 가운데 20세기 말에 내 놓은 『오시는 하나님』을 통해 다시 한 번 그의 종말론적 신학의 깊이와 넓이를 세계의 신학계에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 책에 등장하는 ‘만유화해’ 내지 ‘만유구원’에 관한 견해는 전통적 구원론 및 종말론의 틀을 흔드는 상당히 파격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구원 및 인간을 포함한 만유의 마지막 운명은 교리 또는 신학에서 뿐 아니라 신앙 실존에 있어서 핵심적인 주제다. 그러므로 그가 희망하는 바처럼 만유가 구원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이며 교회가 고백해야 할 진리인지 여부를 규명하는 것은 교회로서는 지체할 수 없는 과제라 생각된다. 다행히 한국 신학계에서는 장신대의 김명용교수가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해 이미 훌륭한 연구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나는 그 논문에 이어서 다소 비판적 관점에서, 그러나 통전적으로 몰트만의 견해를 고찰하고자 한다. 먼저 그의 주장을 상세히 알아본 후에, 만유구원에 대한 희망의 교리가 가진 여러 문제점을 규명한 후, 성서적, 신학적 그리고 선교적 관점에서 이중심판론과 만유구원론에 대한 평가 및 통전적인 이해를 시도하고자 한다.

II. 몰트만의 만유구원론 이해

몰트만은 그의 책 『오시는 하나님』의 제3장 11절에서 모든 사물의 회복(Die Wiederbringung aller Dinge)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거기에 나타난 만유화해 또는 만유구원에 대한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심판교리는 원래 세계사의 희생자들의 희망의 교리였다: 희망이냐 두려움이냐?

본래 세계 심판에 대한 희망은 억압자들과 살인자들에 대한 거룩한 정의의 승리에 대한 세계사의 희생자들의 희망이었다. 콘스탄틴 황제의 전환 이후에 비로소 심판은 행악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오직 행악자들에게 정향되었고, 황제의 재판권의 원형으로 이해되었다(262). 심판에 대한 중세의 그림들은 사람들에게 불안, 경악을 확장시켰는데 그것은 교회가 제공하는 은혜의 수단들로부터 위로와 구원을 찾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복음을 통하여 의롭게 하는 믿음을 깨우기 위해 양심의 고통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심판에 대한 기대는 위협과 놀람의 메시지였지 기쁨과 해방의 메시지가 아니었다. 이제 하나님의 심판의 복음을 발견하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정의 안에 있는 기쁨을 일깨울 때가 되었다(263).

2. 최후의 심판의 결과에 대한 교리 배후에는 신론이 있다: 냉담한 하나님이냐 사랑의 하나님이냐?

개신교 교리에 있어서 질문은 언제나 최후의 심판의 결과에 대한 것이었다. 신자들은 하늘의 열락에 이르고 불신자는 지옥의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심판의 이중적 결과’ 곧 이중심판이냐, 아니면 마지막에 모든 것이 구원을 받고 열락을 누리게 되며 모든 사물이 새 창조 속으로 영입된다는 만유화해 혹은 만유구원이냐는 것이다(263). 이 질문의 뒤에는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숨어 있다. 곧 창조자 하나님은 삶과 죽음과 부활 속에서 그의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시는가 아니면 심판자로서 구원하거나 저주하기 위하여 그의 피조물들에 대하여 냉담한 태도로 대칭하여 계시는가?

3. 심판자는 자신이 계시한 의와 다른 심판을 할 수 없다.

문제는 ‘이중심판’ 인가 아니면 ‘만유화해’인가에 있는데, 이것을 해결하려면 심판이 무엇이며, 심판자가 누구이며, 심판을 집행하는 의는 어떤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예수가 심판자라면 그는 자신이 계시한 의, 곧 원수사랑 및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들을 용납하는 법과는 다른 의에 따라 심판할 수 없을 것이다(263). 최후심판이 섬기는 의는 정의를 창조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의,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언하는 의, 사도 바울이 자기의 복음에서 선포한 칭의의 의와는 다른 의일 수 없다(263-264).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계시한 것과는 다른 무엇이 세계 심판으로부터 기대된다면, 신학은 기독교신앙을 내적 모순에 빠지게 하는 것이 된다. 최후심판의 목적이 죄인들과 성도들과의 거대한 마지막 청산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마지막(das Letzte)’일 것이다. 그러나 최후심판이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 가운데 하나님의 의의 계시와 성취에 봉사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의 ‘새 세계’를 영속적 의(義) 위에 세우고 그리하여 영원한 평화를 창조하신다면 마지막 심판은 ‘최후 직전(das Vorletzte)’ 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의 나라와 모든 사물의 새 창조가 될 것이다(264).

4. 만유화해론의 역사

교부시대부터 버림받은 이론인 만유화해론은 17세기와 18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함께 버림받은 천년왕국론과 더불어 초기 경건주의로부터 개신교에 다시 나타났다. 뷔르템베르크주 신학자 요한 알브레히트 벵엘(Johann Albrecht Bengel, 1687-1752)은 최후심판과 하늘과 지옥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은 보편적인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봉사한다, 그러므로 지옥의 고통은 영원히(ewig) 한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구한 시간으로(aeonisch) 제한되어 있으며,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때 아무런 지옥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265). 그의 제자 외팅어(Fr. Chr. Oetinger, 1702-1782)는 이를 더 깊이 발전시켰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회복될 것(엡 1장; 골 1장)이라는 하나님의 결의 아래 전체 종말론을 종속시켰다. 은혜의 선택이 하나님의 모든 길의 시작이라면 모든 사물의 회복이 그의 목적이요 끝이라는 것이다(265). 뷔르템베르크의 한(Hahn) 공동체와 블룸하르트(Blumhardt) 부자와 관련된 부흥운동도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들의 영향을 입은 종교사회주의자들, 헤르만 쿠터(Hermann Kutter), 라가츠(Leonhard Ragaz) 등은 모든 인간의 궁극적 구원을 넘어서, 새 창조에 있어서 자연의 모든 사물의 회복도 기대했다(266).

바르트(K. Barth)는 블룸하르트 부자로부터 구원 보편주의(Heilsuniversalismus)를 받아들였는데, 그리하여 에밀 브룬너에 의하여 이렇게 비판을 받았다. “바르트는 역사에 존재했던 모든 만유화해론자들을 넘어간다. 성서는 만유화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심판과 두 결과, 곧 지복과 저주를 말한다. 그러므로 만유화해론은 심판의 부인이다.” 알트하우스(Paul Althaus)는 두 사람을 중재하는 입장을 가졌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의 종말론은 인류역사의 가능한 이중 결과에 대한 생각을 포기할 수 없다, 하나님이 불신자들에 대해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는 하나의 비밀이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필연적인 것은 첫째, 영원한 멸망에 대한 두려움, 둘째 모든 것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신뢰인데, 여기서 제3의 것이 추론된다. “우리는 두 가지 사상, 곧 두 가지 결과에 대한 사상과 만유회복론(Apokatastasis)에 대한 사상을 함께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만유의 구원에 반대하는 입장을 지닌 학자로 에벨링(G. Ebeling)과 라초우(C.H. Ratschow)를 들 수 있다. 에벨링은 에밀 브룬너의 견해를 따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서는 만장일치로 하늘과 지옥의 상징 하에 종말사건의 두 가지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다. . . 악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는 악의 근원에 대한 해명과 마찬가지로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라초우는 말하기를, “한 편의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의 영광으로 들어가고, 다른 한 편의 사람들은 영원한 불로 저주받을 때 심판은 심판으로서 그 의미를 가진다.”

5. 두 경우에 각각 짚어야 할 문제점

만유화해가 선포될 경우 다음과 같은 경솔한 생각이 나타날 수 있다. 즉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어떻든 구원을 받는다면, 왜 내가 믿어야 하며,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선포할 경우, 선포 자체가 스스로 폐기되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일어날 일을 선포할 필요가 있는가?

심판의 두 결과 곧 이중심판이 선포될 경우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마침내 인류의 다수를 저주하고 단지 소수만을 구원한다면 무엇을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증오하는 일 없이 그 자신의 피조물들을 증오할 수 있는가? 열락과 저주가 인간의 신앙과 의에 의존한다면 하나님은 그의 판단을 인간의 의지에 의존하도록 만들며, 이리하여 사실상 자기 자신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는가(267)?

6. 저주는 영원하지 않다.

브룬너, 에벨링, 복음주의자들, 근본주의자들은 만유화해론을 사변적인 이론으로 파기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성서에는 두 가지 경우에 해당하는 본문들이 있다. 만유화해에 해당하는 본문은 사도행전 3:21, 에베소서 1:10, 골로새서 1:20, 빌립보서 2:10-11, 고린도전서 15:25,28, 로마서 5:18, 고린도전서 15:22, 로마서 11:32 등이다. 이중심판에 관련된 본문은 마태복음 7:13이하, 마태복음 12:32, 마가복음 16:16, 마태복음 25:31-46, 마가복음 9:45,48, 누가복음 16:23, 요한복음 3:16,36, 빌립보서 3:19, 고린도전서 1:18, 고린도후서 2:15 등이다. 그러므로 우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만유화해 그리고 심판의 두 결과는 성서적으로 잘 증언되어 있다. ‘성서’의 기초 위에서는 이편이나 저편에 대한 결단을 내릴 수 없다”(269).

먼저 저주의 영원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사실상 저주(Verdammnis)가 있지만 그것이 영원한가(269)? 헬라어 ‘아이오니오스’(aionios)는 히브리어 ‘올람’(olam)과 같이 고정된 끝이 없는 시간, 긴 시간을 뜻하지, 헬라 형이상학의 절대적이고 무시간적 의미의 ‘영원’(ewig)을 뜻하지 않는다. 복수형 ‘올라민’(olamin) 혹은 ‘아이오네스’(aiones)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것이 무시간적 영원이 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무시간적 영원은 오직 단수형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일 저주와 지옥의 고통이 ‘영원’하다면 그것은 상대적으로 영원하며(aeonisch), 긴 시간적 혹은 마지막 시간적(endzeitlich)이다. 하나님 자신만이 절대적 의미에서 영원하며 양적 의미에서 무한하다.

7. 지옥은 ‘최후 직전’의 일이고, 최후는 ‘만유화해’다.

마가복음 9:49에 의하면 지옥의 불은 정화의 불(Reinigungsfeuer), 교육을 위한 벌이다. 또 열락과 저주는 마태복음 25장에 의하면 불균형 가운데 있다. 복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처음부터'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저주를 받는 자들에게 지옥의 불은 세상 처음부터 마련되어 있지 않고, 그러므로 그것은 세상의 마지막까지 지속될 필요가 없다. 바울과 요한은 멸망(Verlorengehen)에 대해 단지 현재형으로 말하지 미래형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시간적으로 그리고 마지막 시간적으로(endzeitlich) 멸망을 당하는 것이지 영원히 멸망당하는 것은 아니다. 몰트만은 발터 미하엘리스(Walter Michaelis)와 함께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심판, 저주 그리고 ‘영원한 죽음’에 대해 진술된 것은 마지막 시간적이고 아이온적인 것(aeonisch)이지 ‘영원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지막의 지평선 상에 있는 ‘최후 직전’(Vorletzt)으로서 종말론적이기 때문이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 이것이 최후이다. “만물의 화해가 얼마나 강하게 혹은 얼마나 많이 증언되어 있든지 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최후의 목표에 대하여 성서가 우리에게 주는 유일한 정보다.”

만유화해를 반대하고 심판의 이중 결과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이 도움 받기를 하나님은 분명히 원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도움 받기를 허용하지는 않는다. 성서의 메시지는 신앙을 위한 복음의 선포이지, 세계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세계사의 가능한 목적에 대한 이론이 아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마지막에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 과연 하나님의 은혜가 자유로운 은혜인지 우리는 물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신앙의 결단은 불필요하지 않은가? ‘만유화해’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를 고정시킨다. 그것은 신앙적 결단의 궁극성을 해소시켜 버린다. 구원을 받는 일이 신앙과 결합되어 있다면, 신약성서의 모든 보편적 진술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구원의 뜻과 관련시켜야지, 역사의 결과와 관련시켜서는 안 된다. 여기서 뜻하는 것은 구원의 가능성이지, 구원의 현실이 아니다. ‘아이오니오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절대적 영원을 뜻하지는 않지만, 신앙과 불신앙의 결단의 취소 불가능성(Unwiderruflichkeit)을 뜻한다. 결단의 부름의 현재 속에서 ‘하나님 앞에’ 서는 신앙의 경험으로부터 인간의 결단의 궁극성이 뒤따른다. 그러므로 ‘심판의 두 결과’는 세계 심판의 마지막 말이다(270-271).

8. 하나님의 분노에 대한 그의 은혜의 더 크심

인간의 죄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다”(롬 5:20). 하나님 자신 안에 분노를 능가하는 사랑의 더 크심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에 대해 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죄에 대해 분노하신다. 그는 죄인을 긍정하시므로 죄에 대해 부정하신다. 그는 자기의 피조물이요 형상인 인간에 대해 영원 안에서 긍정을 말하였기 때문에 시간적인 부정을 말하신다. 그는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세계의 죄들을 심판하신다. “그는 다시 살리기 위해 죽인다. 그는 스올로 내려가게 하시며 다시 올라오게 하신다”(삼상 2:6).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그의 분노가 아니라 그의 은혜다. “그의 분노는 잠깐 계속되며 그의 은혜는 한 평생 계속된다”(시 30:6).

하나님은 죄인을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시며, 죄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인격으로부터 분리시켜서, 죄는 정죄하고 죄인의 인격은 무죄판결 하신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인간과 이 세계를 비극으로 몰아넣는 불의를 저주하시는 분노는 그의 열정적 사랑의 표현일 뿐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버림의 역사적 분리주의(Partikularismus)는 구원의 보편주의(Universalismus)를 위하여 봉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의 최후심판은 두 가지 결과를 갖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의 새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의의 보편적 성취를 위해 봉사한다. 이러므로 세계 심판과 만유화해는 모순이 아니다. 만유화해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그의 영광의 나라로 모으시기 위하여 그의 회복시키고 의롭게 하는 의를 그 속에서 계시하는 세계 심판을 통하여 일어난다(271).

9. 구원의 결정권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만유화해론을 거부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믿음을 통해 구원하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더 큰 은혜는 운명의 힘이나 폭력적인 힘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을 통하여 인간을 믿음으로 부르시고 자유로운 결단으로 이끄시는 사랑의 힘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정복하심(Überwältigung)으로써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설득하심(Überzeugung)으로서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구원의 의지를 인간의 믿음에 의존하게 하실 만큼 자기를 낮추신다. 그는 자기를 너무도 낮추셔서 자기의 영광을 인간의 손 안에 두신다. 그는 상관성에 의존하여,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과 그의 신앙과 불신앙을 존중하여 최후심판 때에 그것에 따라 각자의 것을 주신다.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화를. 만유화해론이 하나님의 구원의 총체성을 강조한다면, 이중심판론은 하나님의 구원과 인간의 신앙의 상호성을 강조한다(272).

이렇게 하여 만유화해냐 이중심판이냐의 문제는 하나님의 결단과 인간의 결단이 어떤 관계냐의 문제로 발전한다. 만유화해론은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표현한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을 하실 수 있으며 또 하실 것이다. 모든 사람이 도움받기를 원하신다면 결국 그는 모든 인간을 도우실 것이다. 반면 이중심판론은 인간의 놀라운 자기신뢰를 표현한다. 신앙 또는 불신앙으로의 결단이 영원한 의미를 가진다면 열락 아니면 저주라는 영원한 운명은 인간의 손 안에 있다. 영원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은 실제로 그들 자신의 행동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기능은 복음 안에서의 구원의 제의와 최후심판 때 인간이 구원을 받아들였는지 아닌지를 확정하는 것으로 위축된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그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을 때에만 그 사람의 구원자가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믿음 안에서 받아들이는 행위가 그리스도를 그 사람의 구원자로 만든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구원하거나 저주하는 것이 아닌가?

이중심판론은 인간이 만물의 중심이라고 믿는 현대인의 사고에 조화되는 이론이다. 그러나 만물의 척도요 세계의 중심인 인간은 그렇게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못된다. 일찍 죽은 아이들, 중증 장애자들이 신앙을 결단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경우 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버림받을 것인가?

그러나 인간의 구원에 대한 결단을 내리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성경 말씀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로마서 8:31 이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 .” 고린도후서 5:19, 하나님은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뿐만 아니라 ‘우주’를 그 자신과 화해시키셨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 뿐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셨다(273).

10. 신앙이냐 구원이냐?

“저주에서 구원으로의 위대한 전환은 골고다에서 일어났으며, 우리의 신앙의 결단이나 전향의 시간에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이 전환의 인격적 경험이요, 수납이지, 이 전환 자체가 아니다. 나의 신앙이 나에게 구원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나에게 신앙을 마련 한다”(273).

열락이나 저주가 인간의 신앙이나 불신앙의 귀결이라면 하나님은 불필요할 것이며 더 나아가 결국 그렇다면 인간이 자기 자신의 하나님일 것이다.(273)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을 동일한 측량막대로 측량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인간으로, 인간을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질적으로 구분된다. 하나님의 결단과 인간의 결단 사이에는 영원과 시간이라는 차원의 차이가 있다.

11. 예정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

예정론은 역사적으로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참된 분리주의(Particularismus verus)이다. 이것은 17세기 개혁교회 정통주의 신학의 예정론인데, 이중예정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의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도움 받기를 원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275). 둘째는 가설적 보편주의(Universalismus hypotheticus)인데, 하나님은 복음을 믿는 사람만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지만, 복음을 모든 사람이 듣도록 결정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한 의지는 보편적이다. 그러나 역사의 결과는 분리적이다(276). 셋째는 참된 보편주의(Universalismus verus)인데, 이것은 둘째와 거꾸로 인데, 믿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의 분리주의는 제한되어 있으나 구원의 보편주의는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택하기 위하여 버리며, 구원하기 위하여 지옥으로 보내며, 다시 모으기 위하여 멸망시킨다. 그는 불신앙을 시간적으로 허용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있어서 그의 은혜는 취소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항하여 그의 불신앙을 영원히 지킬 수 없다(276). 넷째는 열려진 보편주의(Offener Universalismus)로써 칼 바르트의 예정론이다. 버림이 있고 버림받은 자가 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죄와 저주가 되신 그리스도가 그분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보편적 버림이 선택에 의해 극복되었음을 선포한다. 그 선택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보편적이다. 예정은 긍정과 부정, 선택과 버림의 균형이 아니라, 부정된 부정으로부터 생성되는 긍정의 불균형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죄와 모든 버림을 십자가에서 짊어지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들이 알든 모르든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화해되어 있다. 신앙을 통하여 그들은 이제 주관적으로 화해되어 있는 자들로 자기를 경험한다. 바르트의 이러한 새로운 예정론은 열려진 보편주의로 이끈다고 말한다(278).

12.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이해: 지옥으로의 여행

기독교적 희망의 폭을 측정하기 위하여 골고다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깊이를 생각한다. 오직 거기에서 우리는 한계가 없는 화해의 확실성, 모든 사물의 회복, 만유의 화해 그리고 영원한 나라를 향한 세계의 새 창조에 대한 희망의 참된 근거를 발견한다(278).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죽음 속에서 그리스도가 무엇을 당하였는지 파악하는 사람은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의 현재적 다스림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할 그의 미래에 무엇이 나타날 것인가 이해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마지막 심판에서의 심판자를 인식한다. 그러므로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는 세계의 화해를 위해 죽으신 분을 기대하지 다른 심판자를 기대하지 않는다. 하나님 없는 자를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의 역사 속에서 경험한 사람은 어떤 의가 파괴된 세계를 다시 회복하며 모든 사물을 바르게 돌려놓을 것인지를 안다. 그것은 복수하는 의, 곧 악한 자에게 악한 것을, 선한 자에게 선한 것을 되돌려 주는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의다. 종말론적 최후 심판에서의 의는 의에 관한 우리의 지상적 형식과는 전혀 다르다. 소위 최후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계시와 그의 구원의 사역의 완성일 따름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심판에서는 속죄에 대한 형법(Sühnestrafrecht)이 적용되지 않는다. 영원한 죽음의 벌이 선고되지 않는다. 최후심판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것의 목적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모든 사물의 회복이다(279).

만물의 회복에 대한 기독교적 교리는 저주나 지옥을 부인하지 않는다. 만유화해의 신적 근거를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서 발견한다. 그리스도는 고난과 죽음에서 세계의 화해와 우리를 위해 지옥과 저주를 경험하였다. 그리스도의 지옥여행이 모든 것의 회복과 하나님나라로 모임의 근거다. 만유의 화해에 대한 희망의 참된 기독교적 근거는 십자가의 신학이며, 십자가의 신학으로부터 나오는 유일한 실제적 귀결은 모든 사물의 회복이다(279).

루터는 그리스도의 지옥경험을 실존적 경험으로, 십자가의 경험으로 이해했다. 그것은 죄와 하나님 없는 존재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의 경험이었다. 이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이 저주받은 세계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고자 하였다. 이것이 죽음의 참된 고통이었으며(행 2:24) 이 고통을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폐기하셨다. “그리스도는 지옥을 열기 위하여 지옥의 고통을 당하셨다. 그리하여 그것은 더 이상 끝날 희망이 없는 것이 되지 않게 하였다. 그는 지옥을 완전히 경험하였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든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 때에 희망을 준다. 그리스도는 지옥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지옥의 문들이 열렸으며 지옥의 담이 무너졌다. 그의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지옥을 파괴하였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그의 지옥의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이후로 더 이상 영원히 저주받음(Verdammt-in-alle-Ewigkeit)은 존재하지 않는다”(282). 지옥 안에 아직도 잃어버린 바 된 자가 존재한다면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에게는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13. 모든 사물의 회복에 대한 종말론: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심판과 새 생명을 일으키는 하나님나라

만유화해와 모든 사물의 회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근거시킴으로서 보편적 은혜의 신학(universale Gnadentheologie)과 분리적 신앙의 신학(partikulare Glaubenstheologie) 사이의 진부한 논쟁은 극복되었다. 정말 모든 사람은 물론 마귀들도 종말에 구원을 받을 것인가의 질문은 희망의 고백 속에서 분명한 답변을 얻을 수 있다. 블룸하르트의 말에서 답변을 찾는다. “하나님이 온 세계에 있는 그 무엇이나 그 누구를 포기한다는 것은 오늘에나 영원에나 있을 수 없다. . . 보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이것이 종말일 수밖에 없다.”

최후의 심판 선포의 종말론적 의미는 구원하는 하나님 나라다. 심판은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역사에 관련되는 측면이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모든 죄인, 악한 자, 폭력 행하는 자, 살인자, 사탄의 자식, 모든 마귀, 타락한 천사들이 해방되고, 그들의 치명적인 파멸로부터 그들의 참된 피조물적 본질로 변화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 모든 사물의 회복에 대한 종말론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는 바, 곧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심판과 새로운 생명으로 일으키는 하나님의 나라이다(284).

“희생자들과 행악자들의 심판자로서 오실 그리스도는 희생자들의 고난과 행악자들의 짐을 극복하고 양자를 악의 지배로부터 하나님의 의의 공동체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판의 목적은 보상과 징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적인 의의 승리이며, 이 승리는 하늘이나 지옥으로 인도하지 않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거대한 화해의 날로 인도할 것이다. . . 심판이 마지막이 아니다. 그것은 만물의 새로운 창조에 기여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지막에서 두 번째의 사건이다. 새로운 창조의 말씀이 궁극적인 사건이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계 21:5)”

14. 만유의 화해에 대한 몰트만의 결론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골 1:16)되었기 때문에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화해되었다면’(골 1:20),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편주의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 2:11) 그러면 만물의 화해에 대한 생각은 더 이상 이단이나 배척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희망과 신뢰의 표현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결정은 하나님 혼자만의 일일 것이다.”

III.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

만유화해론 내지 만유구원론에 대한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트만은 만유구원에 대한 희망의 교리를 논증하였다. 나는 만유구원론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희망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영광과 모든 인간 나아가 모든 피조물의 궁극적인 완성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몰트만의 논증에는 성경에 비추어 볼 때 다음과 같이 선뜻 동의하기 힘든 점들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1.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인간의 의도에 의하여 좌절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를 비교할 때 하나님의 의지가 더 강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지를 강권적으로 지배하고자 하시는지에 대해서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듯하다. 성경 이야기에 의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실지라도 인간의 의지를 마음대로 지배하시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도가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좌절된 경우가 많았음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은 하실 수 있지만 인간이 거부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에게 불순종할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으며,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모든 행위와 삶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존재로 살아간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책임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이 성경과 거의 모든 신학자들의 공통된 사상이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은혜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시지만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그 책임은 인간에게 있고 하나님에게 없다는 것과, 또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성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불순종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성경기자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에도 불구하고 범죄와 심판과 지옥이 존재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약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하나님의 은혜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다. 만약 종말에 이르러 하나님이 불가피한 수단을 사용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의 모순으로 비판받게 될 것이다. 인간이 죄를 지으려고 할 때는 막지 않으셨던 분이 이제 와서 인간으로 하여금 반드시 믿고 구원에 이르도록 만드신다면, 비록 인간에게 유익한 일이기는 하지만, 일관성 없다는 비판에 직면하실 것이다. 인간의 의지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반드시 움직일 수 있으셨다면, 왜 하나님은 진작 그렇게 하지 않으셨느냐는 책임추궁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2. 그는 지옥의 영원성에 대해 성서에서 사용된 헬라어 ‘아이오니오스’(aionios), 히브리어 ‘올람’(olam)은 긴 시간이지 절대적 의미에서의 영원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이 저술되던 시대에 절대적 영원을 의미하는 단어가 따로 있었는가를 먼저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더 적합한 단어가 있는데도 성서의 기자들이 일부러 그것을 피한 것이 아니라면 몰트만의 단어 해석은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몰트만 자신도 그와 같은 단어를 발견해 내지 못한 것으로 보이고, 어떤 학자도 아직 그런 단어를 발견한 것 같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성서 기자들의 어휘력으로서는 ‘아이오니오스’ 이상의 적합한 단어가 없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들은 그 단어로서 몰트만이 부정하는 형이상학적 영원(ewig)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에 대해 좀 더 명시적인 표현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길고 긴 시간 후에 지옥이 끝나고, 모든 사람, 나아가 만유가 다 구원받게 되리라는 사상은 적어도 성서 기자들의 심중에는 없었으리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3. 몰트만은 성서가 증언하는 최후의 사건은 계시록 21:5의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오는 21:7,8절에 ‘이기는 자’와 ‘둘째 사망’을 당하게 될 죄인들이 함께 언급되어 있음을 간과하지 않았나 싶다. 최후의 사건인 만물을 새롭게 함으로써,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었는데, 그 안에는 둘째 사망, 곧 지옥이 있다. 그러므로 최후의 사건이라는 ‘만물을 새롭게 함’이 모든 사람들의 구원이라고 볼 수 없다. 또 계시록 22장에 최후의 일을 기록한 내용에, ‘예루살렘 성 밖에 있을 사람’이 있고(22:15), 또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림을 당할 사람’이 있다(22:19). 이 사람들을 모두 다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해석할 방법은 도저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몰트만은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된다’라는 말씀을 만물의 회복 내지 구원을 가리키는 본문으로 이해했으나, 위와 같은 이유로 나는 꼭 그렇게 해석해야 된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실현되는 것을 가리키는 바, 지옥도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이 실현된 상태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긍정적인 측면에서 실현된 것이 천국이라면, 부정적으로 실현된 것을 지옥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4. 몰트만이 주장하는 바, 만유의 구원 곧 모든 피조물이 다 회복되고 구원을 받는 일이 과학적으로 타당한 일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가령 이 세상에 산 적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산다고 할 때, 거기에는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 예를 들어 배아나 수정체까지도 해당되어야 할 것이다. 또 한 개인에 대해서 말한다면, 예를 들어 소년의 모습, 장년의 모습, 노년의 모습이 있을 때, 그 어느 한 모습도 포기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모습으로 회복된다고 말할 것이며, 아니면 한 개인이 수많은 모습을 띠게 되는 것으로 말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즉 구원의 대상을 도대체 어디까지로 한정지을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다. 나아가 그것을 모든 동식물에까지 연장하고 더 나아가 모든 무기물까지로 연장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더 이상 상상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 모든 피조물이 다 장차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을 어떤 성서기자가 예상했을까 싶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의 회복이라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필경은 많은 부분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5.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지옥여행에 대하여 말하지만, 성서에는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가셨다는 본문이 그렇게 확실하지는 않다. 그렇게 여길 가능성이 있는 본문이 몇 개 있지만, 그 경우에도 몰트만의 해석처럼 지옥문을 연다거나 지옥을 파괴한다거나 지옥의 벽을 허문다는 뜻으로 단정할 수 있는 대목은 거의 없지 않은가 생각된다. 오히려 그리스도 자신의 확실한 죽음, 우리를 위한 영적 고통,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가심 등의 추론이 가능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지옥여행에서 만유의 회복에 대한 거대한 이론을 전개하는 것은 성서적 근거가 아직 약하다고 생각된다.

IV. 결론: 이중심판론과 만유구원론에 대한 평가 및 통전적 이해를 시도하며

현재로서는 만유의 구원을 희망하는 몰트만과 몰트만을 지지하는 많은 학자들이 왼편에 있고, 전통적인 이중심판론이 옳다고 하는 더 많은 학자들이 오른편에 있음을 보게 된다. 성서적, 신학적 그리고 신앙과 선교적인 관점에서 이 두 가지 이론을 고찰할 때 어느 쪽도 선뜻 버리거나 취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둘 중 하나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은 무언가 진리의 한 면을 버리는 것처럼 여겨진다. 알트하우스가 했듯이 두 가지 사상을 다 포함하는 제3의 길을 추구하면서 통전적 이해를 시도해 본다.

1. 만유구원론은 성서적으로 충분한 지지를 받는다고 할 수 없다.

김명용이 이미 지적한 것처럼 몰트만의 만유구원에 관한 희망의 교리는 성서적인 비판의 대상이 된다. 앞의 제 III장에서 살펴 본 것처럼,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은 성서적인 면에서 상당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몰트만의 이론은 바르트의 예정론, 화해론과 마찬가지로 성서의 문자적 해석 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정초하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만인 및 만유의 구원이라 주장하는데, 그것은 그의 신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결론이 되겠지만 성서 자체의 명시적인 선포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신학과 성서 해석의 다양성을 고려할 때 어느 하나의 해석에 몰입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대한 하나의 신학적 관점에 근거하여 이중심판을 말하는 무수한 성서 본문을 경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바르트에 이은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중심적 성서해석 내지 신학의 가치는 충분히 인정하지만, 그것이 성서의 많은 본문들에 나타나 있는 자명한 의미를 경시하는 결과가 된다면 수용되기 힘들 것이다.

2. 전도 및 선교적 관점에서 이중심판론과 만유구원론은 각각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중심판론은 불신자로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슬픔을 위로받을 길이 없다는 것과 여러 가지 환경이나 장애로 인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지기 힘든 사람들의 구원 문제에 대해 아무런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결정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전도하는 열정을 불태울 수 있고 그 결과 교회 성장 및 세계선교사역에 있어서 큰 장점을 가진다.

한편 만유구원론은 불신자로서 죽은 사람들이나 이 세상적 환경에서는 도저히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자들의 궁극적 구원에 대한 희망이 주어진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수많은 인류를 영원한 지옥에 빠뜨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반발하며 마음 문을 닫아 버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있게 하므로 오히려 전도의 기회를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반면, 불신자의 구원에 대한 절박성이 약화되므로 전도의 열정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단점을 가진다.

3. 만유구원론은 만유의 구원을 위한 기도의 필요성을 가르치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몰트만의 만유구원에 대한 희망의 교리가 가진 긍정적인 측면 중 중요한 한 가지는 만유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찍이 만유구원론을 비판한 바 있는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배신한 자들에 대하여 성도들이 기도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에서는 만인구원에 대한 희망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못된다. 과연 그럴까?

만유구원을 위한 기도에 있어서 나는 아우구스티누스보다 몰트만의 편에 서는 것이 옳다고 본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반역자인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다윗의 마음과 방불하다고 생각한다(삼하 18장). 그때 다윗은 자기의 신하들에게 압살롬을 죽이지 말도록 명령했고 그들이 그를 긍휼히 여겨주기를 바랐다. 요압이 그를 죽였을 때 다윗은 요압을 범죄자로 여겼다. 압살롬은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지만, 신하들이 그를 긍휼히 여겨주기를 바란 다윗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악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바라실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몰트만의 만유구원에 대한 희망의 교리의 핵심이 아닌가 생각한다. 만유구원에 대한 희망은 온 인류의 형제애의 교리로 볼 수 있다.

4. 만유구원론 보다 만유구원에 대한 희망의 교리가 더 바람직하다.

만유구원론과 만유구원에 대한 희망의 교리를 구별한다면 서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만유구원론은 만유가 구원받는다는 것이 옳다는 것이고, 만유구원에 대한 희망의 교리는 만유구원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것이 옳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자는 만유가 구원받지 않으면 틀린 교리가 됨에 비해, 후자는 만유가 구원받지 못하더라도 틀린 교리가 되지 않는다. 만약 만유구원의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 자체가 가치가 있다면, 설령 만유구원이 진리가 아니더라도 그에 대한 희망은 긍정적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만유구원에 대한 희망의 교리는 만유구원론 보다 좀 더 유연한 교리라고 할 수 있다. 만유구원론이 성서적으로 지지받기 어려움이 있음을 감안하면 만유구원에 대한 희망론에 무게를 두는 것이 좀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5. 은폐와 계시

만유구원과 이중심판이란 두 사상에 대한 통전적 이해의 한 시도로서 은폐와 계시라는 틀을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곧 이중심판을 하나님의 드러내신 뜻으로, 만유구원은 아직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중심판을 계시에 배속시킨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인 성서에 문자적으로, 좀 더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고, 만유구원을 은폐에 배속시킨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숨겨져 있는 뜻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해력의 한계 때문에 하나님은 얼마동안 최선의 것을 보류하시고 차선의 것을 인간에게 드러내신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그 얼마동안에는 하나님의 차선이 인간에게는 최선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예로써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얼마 동안 이스라엘에게 몽학선생과 같은 율법 아래 있기를 요구하셨다. 최선은 복음이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얼마 동안 차선인 율법 아래 두셨고, 그 동안에는 율법을 하나님의 최선인줄 알도록 허용하신 것이다. 이중심판과 만유구원의 관계도 그와 같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율법을 최선으로 여겼듯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중심판을 최선의 진리로 여기는 것이 하나님께 허용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서에는 하나님 자신의 궁극적인 진리만이 아니라, 우리가 지상에 사는 동안 최선인줄 알고 믿기를 원하시는 진리도 계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경우 하나님의 궁극적인 진리가 성서에 아직 명료하게 계시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에 좀 더 명료하게 드러나 있는 이중심판의 교리를 고백하며 가르치되, 동시에 하나님의 궁극적 진리로서의 가능성이 있는 만유의 구원을 위해서 소망 중에 기도하는 삶이 바람직한 신앙생활이 아닐까 생각한다.

<주제어>

만유구원, 만유화해, 몰트만, 이중심판, 심판.

(universal salvation, universal reconciliation, J. Moltmann, double judgment, final judgment)

<참고문헌>

김명용. “몰트만의 종말론”,『몰트만과 그의 신학-희망과 희망 사이』. 서울: 한들출판사, 2005: 247-277.

______. “몰트만의 만유구원론과 구원론의 새로운 지평”,『이 시대의 바른 기독교 사상』.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2: 283-315.

몰트만, 위르겐/곽미숙 역. 『절망의 끝에 숨어 있는 새로운 시작』.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아우구스티누스/조호연, 김종흡 역. 『하나님의 도성』.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5.

Althaus, P. Die letzten Dinge. Gütersloh: C. Bertelsmann,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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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ltmann, J. Das Kommen Gottes - Christliche Eschatologie. Gütersloh: Chr. Kaiser/Gütersloher Verlagshaus, 1993.

Ratschow, Carl H. “Art. Eschatologie VIII”, TRE, 10. Berlin: Walter de Gruyter, 1982: 334-363.

Stuhlmacher, P. Biblische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I.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92.

<abstract>:

"A Holistic View on J. Motmann's Theory of Universal Salvation"

Tae-Young Choi, Th. D.

Professor

Youngnam Theological University & Seminary

Kyungsan, Korea

J. Moltmann produced biblical, historical, and theological bases for his theory of universal salvation (or reconciliation). Although his grounds are very persuasive, I cannot wholly agree with his theory and offer some criticisms of its shortcomings. I sought to find the right way between two theories: one, the traditional doctrine of double judgment and the other, universal salvation by Moltmann. I think the best approach is a holistic view -- not choosing one and giving up the other, but accepting both of them because both have strong bases and merits. With this aspect in mind, we can view the theory of Moltmann as follows:

First, the theory of universal salvation is regarded as a much better idea in the view of mainstream theology, but it has insufficient basis in the Scriptures. It is supported by K. Barth's theory of predestination and reconciliation, but we cannot deny that the Scriptures are more favored in the theory of double judgment than in universal salvation.

Second, the two theories have separate strengths and weaknesses in the realms of evangelism and world missions. The theory of double judgment has the strength of enhancing evangelical passion, while the other has more strength in expressing God's loving will by way of guaranteeing ultimate salvation to people who are unable to confess their faith in Christ because of several factors.

Third, the theory of universal salvation may be recognized as the better theory in expressing the heart of God towards sinners, and in this respect, the universal salvation theory is affirmative because it teaches that we have need to pray for all human beings including the evil ones. In this case, calling it the theory of the hope of universal salvation is more accurate than the theory of universal salvation itself since the Scriptures do not conclude that all things in the universe will get salvation, but instead say that there is hope of universal salvation in God's heart.

Fourth, I propose including both of the two theories under the holistic framework of concealment and revelation. Thus we can understand double judgment as God's apparent will represented in the Scriptures and universal salvation as God's possible ultimate will concealed in the Scriptures. Therefore I conclude that the official doctrine should be the theory of double judgment because it is much clearer under the light of the Scriptures compared to Moltmann's theory, although which will be revealed as the ultimate truth in the future is unkn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