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으면서 밑준 친 부분입니다.
John MacArthur. the Truth War. 신성욱역. 『진리전쟁』. 서울:생명의말씀사, 2007.
맥아더목사
Grace Community Church 담임목사.
저서: 『강해설교의 재발견』. 『무모한 신앙과 영적분별력』. 『성경의 핵심을 꿰뚫어라』. 『하나님의 뜻』.
1. 진리전쟁이란 ‘속임의 시대에 확실한 진짜를 가려내는 싸움’(副題)
2. 오늘날 거짓을 위해 싸우고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자들은 끝도 없이 많지만, 진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려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3. 오랜 싸움에서 상대방을 포기하고 타협하게 만드는 것만큼 어두움의 세력들이 즐겨 사용하는 공격용 무기는 없다.
4. post-modernism: 진리의 확고부동함을 무시한다. 다른 모든 진리에 관한 주장을 조직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유일한 목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솥에 넣고 오랜 시간 팔팔 끓이면 무엇이 남는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실히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본래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은 확실성이란 것을 오만하고 엘리트주의적이고 강압적이어서 항상 옳지 않는 것으로 보아왔다.(42) 포스트모더니즘을 따르는 사람들은 진리를 주장하는 것을 경멸한다.(42)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진리가 고정되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독특하고 주관적인 인식에 따라 개인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상대주의의 승리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도덕성과 죄책감을 인간의 삶에서 제거하려는 헛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43)
5. 합리성: 합리주의는 거절당해야 하나 합리성마저 버려져서는 안 된다. (신앙은 이성의 영역 안에 있지 않다. 그러나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합리적으로 다 설명되지 않을 뿐)
6. 진리전쟁: 하나님의 사람들이 치러야 할 전쟁은 오직 진리를 위한 싸움이다. 진리 전쟁은 이념과 정신에 관한 것이다. 거짓교리와 악한 이데올로기, 잘못된 신앙이 우리의 적이다.(67)
7. 신앙과 행위: 성경은 올바른 신앙인은 올바로 행동한다고 가르친다. ... 그러나 그 반대는 절대 아니다. 진리를 진실하게 사랑하지 않으면서 경건을 행한다면 그 행위는 결코 참된 정통실천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자기 의’라고 하는, 위선 가운데 가장 최악의 종류이다.(70)
8. 교회와 진리: 바울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라고 불렀다. 우리에게는 인간의 모든 이론과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반대해서 자라온 세상 가설들에 맞서 진리를 보호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칼을 휘둘러야 할 의무가 있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할”(고후 10:5) 때까지 그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누구보다 교회가 그 싸움을 계속 수행해야 하는데, 지도자들이 본을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의 소명에 충실하지 않는 것이다.(72)
9. 사탄의 방법: 사탄은 거짓말을 선동함에 있어서 자신의 대리인인 귀신들과 불신자들, 그리고 심지어 진리와 관련된 사람들(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수단임)과 혹은 진리의 대리인으로나 광명의 천사들로 가장한 자들(최악의 경우)을 활용한다.(73)
10. 배교: 배교는 오늘날에도 여전한 위험요소이다. 대다수 그리스도인이 거짓교리가 교회 안에 널리 유포되는 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또한 배교에 맞서 진지하게 싸우려 들지도 않는다. 게다가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여는 우호적인 분위기를 좋아하고, 반대 사상을 용납하고 배교자들과도 되도록 관대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배교의 위협 앞에서 그 어느 때보다 더 절박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79)
11. 진리전쟁의 적: 가장 단호한 적과 심각한 위협은 교회 내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기독교의 필수 진리를 공격하는 것이다.(120)
12. 유대주의와 영지주의: 유대전통(*율법 행위의 의)이라는 미명 아래 복음을 묻어버림으로써 유대주의자들의 교리가 복음을 흐린 것처럼, 영지주의는 이방 이데올로기로 진리를 덮어씌움으로써 기독교 진리의 모든 특징들을 변경시켰다. 유대주의자들처럼 영지주의자들은 이신칭의를 부정했고, 따라서 복음의 초점을 옮겨버렸다. 그들이 대신 선포한 메시지는 ‘심판으로부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셨는가’에 관한 진리가 아니라, ‘깨달음(enlightenment)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영지주의자들은 구원을 이런 식으로 대체했다)였다.
13. 사도 요한의 일화: 요한은 기독교교리의 핵심진리를 부인하는 가짜 기독교선생들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명확한 가르침을 준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요한이서 10-11) 이레네우스는 요한이 한 때 세린투스(*영지주의자)라는 이단이 목욕탕에 있음을 알고는 에베소에 있는 대중 목욕탕에 들어가기를 거절한 적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토록 요한은 진리를 사랑했고, 영지주의 사상을 전하는 자들과의 어떤 유의 교제도 거절할 정도로 거짓을 싫어했다.(131-2)
14. 포스트모더니즘의 격언: 도덕적으로 대화가 말다툼보다 좋고, 본질적으로 토론(*토의)이 논쟁보다 더 덕을 세우는 것이고, 항상 교제가 싸움보다 낫다.(139)
15. 아리우스주의가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까닭 그리고 한 사람의 戰士, 아타나시우스: 태평스럽고 편안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세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리를 별 조심성 없이 받아들였다. ... 콘스탄틴은 마지막 적을 정복함으로써 오랜 전쟁을 끝냈다. 이제 제국에는 평온하고 관용적인 마음이 넘쳐났다. ... 오랜 세월 전투에 시달려 온 하나님의 백성이 마침내 평화를 만끽하게 되었다. 이런 때에 교회 내에서 또다시 교리와 관련한 싸움을 부추기고픈 사람이 어디 있었겠는가? ... 그런 과정에서 아리우스의 교리를 끝까지 반대한 무리들은 점차 교회 내에서 독특한 소수가 되기 시작했다. 미온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아리우스주의를 대놓고 대적하는 소수를 향해 사납고 비판적이며 악의적으로 불화를 일으키는 자들이라는 비난을 퍼부어 댔다. 예수가 참으로 완전한 하나님인지, 아니면 거의 하나님에 근접한 분인지에 대한 것이 뭐 그리 큰 대수냐는 식으로 모든 갈등들을 무마해 버렸다. ... 니케아 종교회의(325년)가 아리우스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린 후 그는 낙심했으나 단념하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신앙을 가르치는데 주력했다. 아리우스에게는 제국 주요 도시의 주교이면서 도덕적 지원과 경제적 후원을 줄 힘있는 친구들이 꽤 많았다. ... 콘스탄틴 대제는 논의에서 이 편이든 저 편이든 어느 편이 이기는 데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단지 갈들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아리우스는 여러 영향력있는 교회 지도자들의 막후 지원 아래 교회에서 자신의 직무 복위를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자기 사상을 실제로 바꾸지 않고 가능한 한 정통교리처럼 보이도록 자신이 쓰는 용어를 열심히 재정의했다. 아리우스는 자신이 오해했고, 잘못 설명했노라 시인했다. 또 모든 주요한 신조들과 사도적 교리의 공식을 지지한다고 고백했다. 자신이 니케아 공의회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둘 사이의 실제적인 차이는 아주 경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는 자신의 대적자들을 무자비한 방해꾼들로 몰아붙이면서 많은 동조를 얻어냈다. 그래서 아리우스는 마침내 논쟁의 정치적 입장을 자기 편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2년 안에 콘스탄틴은 공의회가 취한 강경노선의 입장이 문제 해결의 진정한 해답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그것이 실수였다고 분명히 못박았다. 그는 아리우스 지도자들의 사면을 선언했고, 그것을 집행하기 위해 신실한 주교들에게 정치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마침내 황제는 아타나시우스를 망명 보내기에 이르렀고, 아리우스파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아타나시우스는 강력한 정치적 교회적 압력해 대항해 타협으로 논쟁을 해결하기를 거절했다. 그는 아리우스의 복위를 끝까지 거부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저술과 설교를 계속했다. 전 세계가 그의 굽히지 않는 비타협적 입장을 대적하고 있다고 누군가가 그에게 말했을 때, 아타나시우스는 “그러면 나도 전 세계를 대적하노라”라는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타나시우스는 성경을 조목조목 예로 들면서 아리우스 이단을 끈질기고 철저하게 반박했다. 아타나시우스는 개인적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든지간에 확고부동했다. 그는 아리우스파에 강하게 동조하는 황제들이 황위를 계승함에 따라 평생 다섯 번이나 망명생활을 했다. 비록 자신의 노고의 결과를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는 교회가 배출한 가장 용감한 진리의 전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 성경적으로 꼼꼼하게 따지는 데는 아리우스주의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리우스가 죽자 그 개인의 카리스마와 단어의 의미를 흐리게 하는 능력, 그리고 죄의 심각성을 분명히 드러나지 않게 하는 영리한 기술이 없는 상황에서 아리우스주의의 실상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이단의 영향력은 곧 시들해졌고, 마침내 기독교의 주류에서 거의 사라졌다. 아타나시우스와 소수의 다른 지도자들의 끈질김과 성경적인 헌신이 마침내 빛을 본 것이다. ...아리우스주의가 오늘날 여호와 증인, 몰몬교, 그리고 다른 소수의 종파와 같은 유사 기독교 단체를 통해 명맥을 이어 오긴 하지만, 아리우스주의의 사멸은 진리전쟁에서 한 사람의 신실한 열심의 능력이 가져다 준 위대한 결과였다. 하나님은 진리를 위한 신실한 전사들을 사용하셔서 다음 세대를 위해 복음을 보존하기 위한 도구로 삼으신다.(146-157)
16. 전투하는 교회: 지상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다. 우리 세대는 진리전쟁을 결코 피할 수 없다. 우리 시대의 기독교는 영적으로 가면을 쓴 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거짓은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교활하고 위험하다. 심지어 어떤 것들은 단순히 새로운 세대를 위해 재활용된 예전의 거짓과 아주 똑같다.(159)
17. 실용주의에 밀려나는 진리: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골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 진리냐?”가 아니라 “무엇이 효과가 있는 것이냐?”이다. 최근 복음주의자들은 신학보다는 방법론에 더 관심이 많다. 진리가 실용주의적 관심에 밀려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청중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메시지를 맞추고자 애를 쓸 때,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194)
18. 확실성의 거절: 확실성의 거절은 실제적으로 불신앙의 한 오만한 형태인데, 이는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충분히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건방지게 거절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203) 개신교는 항상 성경의 명료성을 확언해 왔다. 하나님이 그 분의 말씀 속에서 명료하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205)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성경의 명료성을 현대인들이 부정하는 것은 성경은 평신도들이 혼자 힘으로 해석하기에는 너무도 분명하지 못하다고 교황의 계급제도가 주장했을 때인 중세적 사고로 후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다른 의미로 볼 때, 성경의 명료성을 포스트모더니즘이 부정하는 것은 중세 종교의 미신이라는 어두움보다 더 심각한 일이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사실상 아무도 성경이 의미하는 것을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이해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실상 모든 것에 대해서 사람들을 영구히 암흑 속으로 가두어 버린다.(206)
19. 사람을 위한 설교: 대표적인 주제 설교는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높이는 많은 교훈적인 주제들을 배제한 채, 인간관계나 성공적인 삶이나 자존심이나 방법론 등 인간 중심의 문제를 더 선호한다.(217)
20. 유일한 비결: 이 세상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오직 하늘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라고 상기시킨다(골 3:2). 그것은 배교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다.(228)
21. 진리전쟁에 나서라!: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과 평화를 추구하거나 거짓 종교와 손을 잡았을 때는 대부분 영적으로 심각한 타락의 시기이거나 심지어 진리를 거의 전적으로 상실한 시기였다. 반면 기독교가 신앙을 위해 열심히 싸울 때마다 교회가 성장하고 진리의 열매가 풍성히 넘쳐났다. 진리전쟁은 선한 싸움이다(딤전 6:12).(236-7)
마틴 루터가 타협하기를 좋아했다면 현대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 때로는 분열 또한 필요하고, 적절할 때도 있다. 특히 교회가 가짜 그리스도인으로 가득 차 있어 보이던 루터의 시대나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하나님의 참백성이 소신을 분명히 밝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타협의 여지란 없다.(254)
22. 세상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먼저 세상의 호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은 오해다. 만일 세상이 우리를 좋아하도록 만든다면 그들은 우리의 구세주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도자 민감형 교회의 오랜 철학이 바로 그것이다. 또 이머징 처치 운동의 강한 가설 가운데 하나도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철학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장하는 바는 무엇인가? 회심하지 않은 죄인들이 기독교메시지를 편하게 느끼도록 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요점은 불신자들이 자연스럽게 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교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세상과 친하게 지내는 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포스트모더니즘의 감각으로 볼 때는 아주 멋었고 온화하고 친근하게 들린다.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한 복음주의 전략은 결코 아니다. 그러한 것은 세상과 타협하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255-6)
23. 찰스 스펄즌: 나는 단순한 설교 외에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사람들의 들을 귀를 여는 다른 수단을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교회가 강단을 경멸하는 순간, 하나님은 교회를 경멸하실 것이다.(258)
24. 죄를 너그럽게 봐주는 교회는 그 자신의 거룩을 파괴하고, 구성원들의 분별력을 뒤엎어 버린다.(268)
25. 분별력으로 가는 길은 영적 성숙의 길이다. 그리고 영적 성숙으로 가는 유일한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비이다.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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