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 the city of God)
1. 저술동기
이교도들이 로마가 당한 약탈과 재앙에 대해서 그리스도교에 책임을 돌리며, 참 하나님을 모독하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집에 대한 열정에 불타서 그들의 모독과 거짓말을 반박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도성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retractations, 2, 43, 2)
2. 두 도성에 대한 정의
나는 인류를 두 부분으로 분류한다. 하나는 인간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구성된 부분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로 구성된 부분이다. . . 나는 두 도성이란 말로서 두 부류의 인간사회를 의미하는데, 하나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도록 예정된 도성이며, 다른 하나는 악마와 함께 영벌을 겪을 운명을 지고 있는 도성이다.(15권 1장, 이하 15.1로 표기)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아를 경멸하게 되고, 자아를 사랑하면 하나님을 경멸하도록 이끈다.(14.28) 그러므로 두 도성은 두 종류의 사랑이며, 이는 외적이고 정치적인 구분이 아니라 내적이며 영적인 차이이다.
하나님의 도성은 가시적인 제도로서의 교회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 중에는 성례전에 참여함으로써 연합하지만 성도들의 영원한 목적지에는 함께 하지 못할”(1.35)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그 도성의 적 중에도 “시민이 될” 사람이 있다. 이들은 회개하게 될 사람들이다. 가시적인 도성 밖에 있으나 하나님의 도성에 속하게 된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개인적인 계시를 받았음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3. 하나님의 도성의 문체
아우구스티누스는 산문작가로 보다는 수사학자로 훈련받았기 때문에 절제감이나 균형감을 거의 갖고 있지 못했다. 그의 모든 저작은 중심주제로부터 벗어나 빗나간 이야기를 한다. 하나님의 도성도 마찬가지로 단일한 저작이라기보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거대한 중심주제 위에서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중단을 겪으면서 구성된 일련의 감상이다.
4. 저술시기
알라릭이 410년 8월 24일 로마에 입성함. 413년에 하나님의 도성을 저술하기 시작.
제1권
섭리와 재앙: 하나님은 섭리로써 재앙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올바르고 칭찬받을 만하게 살아가도록 훈련시키신다. 또 전쟁을 사용하여 계속적으로 인간의 타락한 품성을 교정시키고 정결케 하신다. (1.1) 하나님은 섭리로서 의인들을 위해서는 불의한 자가 누리지 못할 장래의 축복을, 또 악인들을 위해서는 선인이 당하지 않을 슬픔을 예비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현세의 좋은 일들과 나쁜 일들은 선인과 악인에게 동시에 임하도록 의도하셨다. 그래서 악인들도 동일하게 향유하는 모습을 보이는 어떤 것들을 우리가 지나치게 탐하지 않게 하고, 또한 심지어 선인들도 종종 겪는 해악으로부터 지나친 두려움을 가지고 움츠러들지 않도록 하셨다.(1.8)
선인과 악인의 태도의 차이: 선인들은 이 세상의 좋은 일들로 인하여 의기양양해 하지도 않고, 이 세상의 나쁜 일들로 인하여 압도당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악인은 현세의 행운에 의하여 타락해 있기 때문에 불행에 의해서는 자신이 징벌 받는다고 느낀다.(1.8)
심판의 지연의 유익: 이 세상에서의 모든 악행에 대하여 명백하게 벌이 가해진다면 마지막 심판을 위하여 남겨질 것이 하나도 없게 될 것이다... 그분께 구하기만 하면 번영을 베풀어 주시는 경우에는 하나님이 단지 그런 보상을 위해서만 섬김 받을 수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그분을 섬김으로써 경건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탐욕스럽고 욕심만 많이 가지게 될 것이다.(1.8)
선인과 악인의 고통의 차이: 선인과 악인이 함께 고통당하며 또 그들이 당하는 고통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 사이에 결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고통이 비록 같을지라도 고통 받는 사람들은 여전히 다른 채로 남아 있다. 덕과 악덕은 비록 같은 괴로움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동일하지 않다... 선인들을 검증하고 정결케 하고 순수하게 하기 위하여 엄습하는 난폭한 일이 악인들을 저주하고 파멸시키고 근절시키도록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똑같은 고난을 당할 때 선인들은 기도하고 찬양하는 반면 악인들은 하나님을 증오하고 모독한다. 이로 보아 우리는 고난당하는 자의 본성이 중요하지, 고난의 본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구정물통을 흔들어 보아라. 더러운 악취가 풍길 것이다. 향료를 흔들어 보아라. 똑같은 동작이지만 이때에는 향기로운 내음이 솟아오를 것이다.(1.8)
고난의 원인: 하나님이 현세적인 재난으로 도덕적인 타락을 징벌하기로 결정했을 때, 선인이 악인과 함께 징벌당하는 주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즉 선인과 악인은 둘 다 악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둘 다 비록 정도는 다르다 할지라도 현세적인 생활을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징벌 받는 것이다. 이와 달리 선인은 현세적인 삶을 경멸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교훈을 얻어 마음을 고쳐먹고 영원한 삶을 목표로 할 수 있도록 했어야 했다.(1.9)
고난과 검증: 고난을 통하여 인간의 영혼이 검증되며,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 어느 정도로 순수한지 각자 스스로의 힘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1.9)
죽음에 대한 태도: 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다면, 죽음은 재앙으로 간주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을 좋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죽음 이후에 받게 되는 응보이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죽어야 하는 인간들은 어떤 사건으로 죽느냐에 대하여 지나치게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염려해야 할 것은 죽음 이후에 다다를 목적지가 어디냐 이다.(1.11)
두 도성의 분리: 두 도성은 이 시기에 결합되고 혼재되어 있으면서 최후의 심판으로 분리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1.35)
제4권
덕성에 대한 시금석: 의로운 사람에게는 불의한 지배자가 부과하는 모든 해악은 죄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덕성에 대한 시금석이다.(4.3)
해적과 알렉산더 대왕의 차이: 알렉산더 대왕이 해적에게 무슨 의도로 바다에서 남을 괴롭히는 짓을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거침없이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것은 당신이 온 세상을 괴롭히는 의도와 같습니다. 단지 저는 작은 배를 가지고 그런 짓을 하므로 해적이라고 불리고, 당신은 큰 함대를 가지고 그런 짓을 하므로 황제라고 불리는 차이가 있을 따름입니다.”(4.4)
왕국의 규모에 대하여: 만약 모든 왕국이 소규모이고 이웃과 조화롭게 기쁨을 나누었더라면, 인간사는 보다 더 행복했을 것이다.(4.15)
제5권
예지와 의지: 우리의 의지 자체는 하나님에게 확실하며 그분의 예지에 의하여 포착되는 바로 그 원인의 질서에 포함되어 있다. 만물의 원인을 미리 알고 계신 분은 분명히 그 원인들 중에 우리의 의지에 대해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5.9) (우리의 의지를 미리 아신다. 그에 따라 행하신다, 그러므로 예지와 자유의지가 둘 다 가능함.) 모든 미래의 일들을 알지 못하는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다.(5.9)
전능성: 하나님이 죽을 수 없다거나 오류에 빠질 수 없다고 말할 때에, 그분의 능력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그에게 아주 불가능하여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의 능력이 감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죽을 수도 없고 오류에 빠질 수도 없는 데도, 분명히 전능하다고 불러도 그 말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그는 의도하지 않는 것을 감수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의도하는 것을 하므로 전능하다고 불리기 때문이다.(5.10)
제8권
하나님의 존재: 그분에게는 존재하는 것과 살아 있는 것이 별개가 아니다. 살아 있는 것과 이해하는 것이 별개가 아니다. 이해하는 것과 지복의 상태에 있는 것이 별개가 아니다. 그분에게는 사는 것과 이해하는 것과 지복의 상태에 있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8.6)
플라톤 철학: 플라톤은 궁극적인 선을 덕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고 결론지었으며, 하나님을 알고 닮는 사람만이 덕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언했다. 그분을 알고 닮는 것만이 지복의 원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 있어서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무형적인 본성을 지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8.8) 플라톤이 하나님에 관해서 가지고 있는 개념을 읽고 들을 때 우리 종교의 진리와 상당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게 된다.(8.11)
제9권
인간, 천사, 짐승: 인간은 짐승과 천사 사이에 중간적이다. 천사는 이성적이며 불멸적인 반면에, 짐승은 비이성적이며 가멸적이다. 인간은 천사보다 열등하며 짐승보다 우월하므로 중간적이다. 인간은 짐승들과는 가멸성을, 천사들과는 합리성을 공유하고 있으므로 이성적이며 가멸적인 생물체이다.(9.13)
중보자의 조건: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중재에는 그분이 죽어야 한다는 것과 그분이 계속적으로 죽음 상태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두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일시적인 죽음을 당하는 동시에 영원한 복을 누림으로써, 일시적인 것을 통해서 죽을 운명을 지닌 존재들과 자신을 일치시켰으며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영원한 상태로 인도할 수 있게 되었다.(9.15) 선한 천사들은 그들 자신이 복되며 불멸적이기 때문에, 비참한 가멸적인 존재들과 복되며 불멸적인 존재들 사이를 중재할 수 없다. (9.15) 불멸하지만 비참한 존재는 그 자신이 비참하므로 우리가 복된 불멸성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중재역할을 할 따름이다. 반면 죽음을 당했으나 복된 중재자는 스스로 죽음을 경험했으므로 죽을 존재들을 불멸하도록 만들며(그분은 부활로써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이셨다) 그 자신이 결코 분리된 적이 없는 복을 비참한 자들에게 부여하기 위하여 중재자가 되었다.(9.15) 나는 그분이 말씀이기 때문에 중보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분은 말씀으로서 최상으로 복되며 최상으로 불멸적인 까닭에 비참한 인간들과는 아주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분은 인간이기 때문에 중보자가 된다.(9.15)
지식의 위험: 마귀(다이몬)들은 지식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단어(다에몬)로부터 그 이름을 얻었던 것이다. ... 지식이 사랑을 결여했을 때 아무 소용이 없고 단지 사람들을 우쭐하게 만들거나 공허한 망상으로 거드름을 피우도록 만든다.(9.20)
선한 천사들이 경멸하는 것: 선한 천사들은 마귀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하여 그토록 자랑하고 있는 유형적이며 일시적인 것들에 대한 온갖 지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런 것들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을 성결케 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들 자신에게 아주 고귀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가슴 속에 불일 듯 타고 있는 거룩한 사랑으로써 비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비교하여 그 아래에 있는 모든 것과 그것에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을 경멸하기 때문이다.(9.22)
제10권
합당한 습관: 심지어 영원한 복과 비교해서는 경멸받을 만한 이 세상의 세속적인 필요사항들과 자그마한 현세적인 이익마저도 하나님으로부터만 추구하게끔 습관을 붙이는 것이 합당하다.(10.14)
마음의 귀와 육적 귀: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그분의 불변하는 진리를 향유하면서 영원토록 복 받은 그분의 사역자들과 사자들의 마음의 귀로 정확하게 들리는 것이지, 육적인 귀로는 들리지 않는다.(10.15)
제11권
천상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의 현재: 천상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은 현세에서는 서로 섞여 있으며 얽혀 있다고 하겠다.(11.1)
악: 원래 악은 그 자체의 본성이 없으며, 선이 없게 된 것을 악이라고 부른다.(11.9) 악의라는 결함은 본성에서 오지 않고 본성에 반대되는 것이며, 사악한 범죄는 창조주에게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서 유래한다.(11.17)
마귀 창조의 목적: 마귀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은 확실히 그가 선을 미워하는 자가 되리라는 것을 모르시지 않았으며, 자기가 그의 사악을 이용해서 이루실 선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시편 저자는 “주께서 이 용을 웃음거리가 되도록 지으셨나이다”라고 한다.(시 104:26, 70인역) 시인이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마귀를 창조하신 순간에는 자기의 인자로 그를 선하게 만드셨지만, 자기의 예지에 의해서 그가 악하게 된 후에도 그를 선용하실 길을 이미 준비하셨다는 점이다.(11.17) 하나님의 조치에 따라 우주의 아름다움은 반대현상과의 대조에 의해서 더욱 찬란하게 된다.(11.18)
하나님의 도성의 기원: 하나님의 도성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것이다. ... 그 도성은 하나님 안에 있음으로써 그 형태를 가졌으며, 하나님을 봄으로써 광명을 얻으며, 하나님 안에 머무름으로써 그 기쁨을 얻는다. 그 도성은 존재하며, 보며, 사랑한다. 하나님의 영원에 그 힘이 있으며, 하나님의 진리에 그 빛이 있으며, 하나님의 선하심에 그 기쁨이 있다. (11.24)
선한 사람: 선한 것을 아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 아니라, 선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다. ... 창조주에게 돌아가면 우리의 존재는 죽음을 모를 것이며, 우리의 지식에는 오류가 없을 것이며, 우리의 사랑에는 실수가 없을 것이다.(11.28)
천사의 두 사회: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니라고 하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빛과 어두움이라고 해석할 것이지만, 우리는 천사들의 두 사회라고 해석한다. (11.33)
제12권
악한 행위의 원인: 행위를 악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의지 자체인데, 무엇이 그 의지를 악하게 만든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악한 행위의 원인은 악한 의지지만, 악한 의지의 원인은 없다. ... 악한 의지는 어떤 악한 피조물 속에 있을 수 없었고, 선하면서도 변할 수 있는 피조물 속에 있었던 것이다. ... 선한 것이 어떻게 악한 의지의 발생 원인이 되겠는가? 선이 어떻게 악의 원인이 되겠는가? 의지가 높은 것을 버리고 낮은 것으로 향할 때 그것은 악하게 되기 때문이다. 의지가 향하는 대상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방향전환 자체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것이 악한 의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뒤집혀서 지나친 욕망으로 낮은 것을 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12.6) 지고의 존재자이신 분을 떠나서 더 낮은 존재로 향하는 것이 악한 의지를 가지게 되는 시초다. (12.7)
변하는 영적 존재에서 악은 악한 의지에서 시작한다. ... 이 의지를 창조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이탈 뿐이다. 이런 이탈 또는 결핍의 원인은 전혀 없다. ... 악한 천사들은 그 선한 의지를 버리고 변했기 때문이다. 선했던 의지를 버렸기 때문에,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의 의지가 악한 것이 분명하다. 또 그들이 선한 의지를 버리는 것을 참으로 원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악의 원인은 선이 아니며 선에서의 이탈이다. (12.9)
바른 사상: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더 쉽게 행복을 얻으리라고 가르치면서 무슨 까닭에 바른 그 사랑이 식게 만드는 사상을 가르치는가?(12.21)
하나 됨: 불화를 고치거나 예방하기 위하여 인간성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논법은 하나님이 조상 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회상하는 것이다. ... 우리는 수는 많아도 마음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회상하게 하셨다. (12.28)
두 도성의 기원: 태초에 창조된 그 처음 사람과 함께 인류 사이에 두 도시 또는 두 사회가 나타났다. 아직 밝히 눈에 보인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예지 안에서는 이미 나타났다. 처음 한 사람에게서 인류가 일어나기로 정해졌으며, 그 일부는 악한 천사들과 짝하여 벌을 받으며 다른 부분은 선한 천사들과 함께 상을 받기로 정해졌다.(12.28)
제13권
죽음의 정의: 영혼이 영생불사한다고 하는 것은 영혼의 생명과 감각은 아무리 미약하게 되어도 결코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대로 몸이 죽는다는 것은 몸에서 생명이 완전히 떠날 수 있으며, 몸 자체에는 독자적인 생명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영혼을 버리시면 영혼이 죽는 것과 같이, 영혼이 몸에서 떠나면 몸은 죽는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영혼이 몸을 떠날 때에는 영혼과 몸, 곧 사람 전체가 죽는다. ... 첫째 사망 곧 몸이 죽는 것은 선한 사람에게는 선이 되며 악한 사람들에게는 악이 된다. 그러나 둘째 사망은 선한 사람들에게는 오지 않는 것이므로 아무에게도 선한 것이 되지 않는다.(13.2)
몸의 생명으로서의 영혼: 영혼이 몸 안에 있으면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든 얻지 못하든 간에 몸은 영혼에게서 생명을 얻는다. ... 영혼은 죽은 때에도 곧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때에도 그들의 몸에 생명을 줄 수 있다. (13.2)
후손들의 죽음의 원인: 처음 사람들은 참으로 죄만 짓지 않았더라면 어떤 종류의 죽음도 당하지 않았을 그런 본성으로 창조되었다. 그들이 처음 죄인이 되었을 때에 사형 언도를 받은 데는 조건이 있었다. 곧 그들에게서 나는 후손들도 모두 같은 벌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그들과 같은 후손만을 낳겠기 때문이다. 그들이 받은 벌은 그들의 엄청난 죄책과 정비례한 것이었으며 그들의 처음 본성을 악화시켰다. 그 결과 처음 사람들의 죄에 대한 벌로써 출발한 것이 그 후손들에게는 타고나는 결과로써 나타난다. ... 그 후로 사람이 낳는 것은 창조된 때의 사람이 아니라 죄를 짓고 벌을 받게 된 때의 인간이었다.(13.3)
율법과 죽음: 율법은 죄인의 악한 욕망을 더하지만 악이 아니며, 이와 같이 죽음은 의인의 영광을 더하지만 선이 아니다. 불의를 위해서 율법을 어기면 범법자가 생기고, 진리를 위해서 죽음을 당하면 순교자가 생긴다. 율법은 죄를 금지하므로 선이며, 죽음은 죄의 삯이기 때문에 악이다. 악인들은 악한 것 뿐 아니라 선한 것도 악용하는 것과 같이 선인들은 선한 것 뿐 아니라 악한 것도 선용한다. 그래서 율법은 좋은 것이지만 악인은 율법을 악용하며, 죽음은 악한 것이지만 선인은 선한 죽음을 죽는다.(13.5)
죄의 첫 번째 벌: 영혼은 이제 자기가 악을 행할 수 있는 그 자유를 기뻐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멸시하기 때문에, 몸이 전과 같이 순종하지 않게 되었다. 자기가 위에 계신 주인을 일부러 떠났으므로 자기 밑에 있는 종이 자기의 뜻에 순종하지 않게 되었다. 영혼이 하나님께 계속 순종했다면 육신도 모든 점에서 영혼에게 계속 순종했을 것이나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13.13)
영과 육: 영이 육의 소욕을 따를 때에 그 영을 육적이라고 하는 것이 부당하지 않다면 육이 영을 섬길 때에 그것을 영적이라고 하는 것도 마땅할 것이다.(13.20)
제14권
육체: 육체의 본질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육체적으로(육적으로) 산다는 것은 확실히 나쁘다. (14.2) 우리는 이 썩을 몸을 짐같이 지고 있다. 이렇게 짐이 되는 것은 신체의 본성이나 본질이 아니라, 그 썩는 성질 때문인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몸을 벗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으로 덧입기를 원하는 것이다.(14.3)
사람을 따라 사는 것,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사람을 따라 살 때에는 마귀와 같다. ... 육신에 속했다고 하는 것과 사람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같은 뜻이다.... 육에 속한(animalis)의 어원인 anima(영혼), 육신에 속한(carnalis)의 어원인 caro(육신)에서 영혼과 육신은 전체인 사람을 가리킨다. (14.4)
악행과 악의: 악한 의지가 먼저 있지 않았더라면 악한 행위에 이를 수 없었을 것이다. 악한 의지의 시초는 교만이다. “교만은 죄의 시작이니라”(집회서 10:13)... 따라서 악행 곧 금지된 음식을 먹었다는 죄는 이미 악하게 된 사람들이 지은 것이었다. 악한 나무만이 악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마 7:18). 그뿐 아니라 나무가 악했다는 것도 본성에 반대되는 사건이었다. 의지가 본성에 반대되는 결함이 없었더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교만한 자들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라고 한다(벧전 2:10). 향상하려는 정신은 좋으나 자기를 향해서 향상하면 교만이 되고, 하나님을 향할 때에는 순종이 된다. 그리고 순종은 겸손한 자만이 할 수 있다... 만일 사람이 이미 자기 만족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면, 마귀는 하나님이 금지하신 일을 한다는 노골적이고 명백한 죄로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 만족에 빠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리라’(창 3:5)는 말을 듣고 기뻐한 것이다. (14.13)
지상도성과 천상도성의 성격: 두 가지 사랑이 두 도시를 건설했다. 하나님까지도 멸시하는 자기 사랑이 지상 도성을 만들었고, 자기를 멸시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천상도성을 만들었다. 따라서 지상도성은 자체를 자랑하며 천상도성은 주를 자랑한다(고후 10:17). 지상 도성은 사람들에게서 영광 받기를 원하고, 천상 도성은 우리의 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최대의 영광으로 여긴다.(14.28)
제15권
인류의 두 부류: 사람의 생각대로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 두 도성이란 두 사회라는 뜻이다. 한 도성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지배하기로 예정되었고, 다른 도성은 마귀와 함께 영원한 벌을 받기로 예정되었다... 가인은 사람의 도성에 속했고, 아벨은 하나님의 도성에 속했다. ...먼저 악하지 않고서 선하게 되는 사람은 없다. ...가인이 도시를 건설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아벨은 나그네였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다. (15.1)
선인과 악인: 지상도성은 하나님이나 신들을 경배하되, 지상에서 승리자로서 평화롭게 지배하는 것을 도와주리라고 기대하며, 선을 행하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배욕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즐기기 위해서 세상을 이용하지만, 악인들은 반대로 세상을 즐기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 한다.
가인과 셋: 가인과 셋의 두 계열은 우리가 논하는 두 도성을 암시한다. 셋의 계열은 지상에 나그네로 있는 천상도성이요, 가인의 계열은 지상적인 기쁨을 탐내며, 그것이 유일한 기쁨인양 거기에 매달리는 지상 도성이다. (15.15)
제18권
성경과 사상서들의 차이: 성경의 저자들의 생각에 서로 상치되는 것이 전혀 없다. 이 사실을 볼 때에 그들이 쓴 것은 하나니이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 또는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믿는 것이 당연하다. ...철학자 가운데는 자기의 주장을 글로 남겨 놓은 사람이 많지만, 그 생각이 서로 완전히 일치하는 두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18.41)
70인역에 대해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둘째 왕 필라델포스는 유대의 포로를 해방. 대제사장 엘리아살에게 성경을 요청. 번역할 사람을 요청. 12지파에서 6명씩 72명이 번역. 다른 곳에서 번역작업을 하게 했는데, 사용한 단어, 단어 배열의 순서까지 일치. 마치 한 사람이 번역한 것 같이 완전히 일치한 사실로 한 성령이 그들 전체 안에 계신 것이다. 성경의 권위를 인간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신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18.42)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에 이스라엘 민족 밖에 천상 도성에 속한 사람이 있었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신 민족은 없었다. 그러나 다른 민족 가운데도 지상적인 인연이 아니라 천상적 인연으로 진정한 이스라엘, 즉 위에 있는 나라의 시민인 사람들이 있었다. 욥이 그 증거이다. 그는 에돔 사람으로서 개종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자기 시대에서 가장 정직하고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칭찬하셨다. (18.47)
그리스도의 죽음과 성령강림일: 주후 29년 3월 25일. 5월 15일. 29년에 대해서는 터툴리안과 락탄티우스도 같은 견해임. (18.54)
지상 도성과 천상 도성의 차이: 지상 도성은 무엇이든지 심지어 사람까지도 거짓 신으로 만들어 제물을 드리면서 숭배했다. 천상 도성은 지상의 순례자로서 거짓 신들을 만들지 않으며, 도리어 참 하나님에게서 창조되며 자신을 참 제물로 바친다. 그러나 두 도성이 다 이 세상에서는 복도 누리고 화도 입는다. 다만 믿음이 다르며, 소망이 다르며, 사랑이 다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최후 심판에서 분리되어 각자의 종국을 맞으며, 거기는 끝이 없다.(18.54)
제19권
최고선과 최고악: 최고선은 선의 완성이요, 최고악은 악의 완전한 발전이다.(19.1) 영원한 생명이 최고선이요 영원한 사망이 최고악이다. 전자를 얻고 후자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바르게 살아야 한다.(19.4)
행복: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은 것 같이 소망으로 행복하게 된다. 우리가 아직 현재의 구원을 가진 것이 아니라 미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이 행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며 여기서는 ‘참음으로’ 기다린다.(19.4)
평화: 천상 도성도 순례 도중에 있는 동안 지상 평화를 이용하며, 신앙과 경건을 해하지 않으면 생활 필수품을 얻는 문제에서 할 수 있는 대로 세상 사람들과 합의하고자 하며, 지상 평화가 천상 평화에 이바지하게 한다.(19.17) 우리에게 특유한 평화를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즐기며, 내세에서는 보면서 그와 함께 즐길 것이다. (19.27)
직위에 대하여: 감독직에 있는 사람은 그 지위에서 지배하는 직분을 품위 있게 이행해야 하지만, 사람들을 지배하는 데에 필요한 그 높은 지위를 탐내는 것은 품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한적함을 사모하는 것은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필요한 사무를 맡는 것은 사랑이 강요하기 때문이다. (19.18) * 사랑 때문에 직분을 맡지만, 맡지 않는 것을 더 사모한다는 것.
제20권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첫째 부활은 지금 있는 것이다. 이 부활은 몸에 관한 것이 아니고 영혼에 관한 것이다. 영혼도 그 죄악 때문에 죽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는 것’은 영혼이 죽은 자들로 몸이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것이다.(20.6) 처음 부활인 영적 부활로 일어나지 않은 자들은 둘째 부활인 몸의 부활을 얻은 후에 다시 둘째 죽음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20.6)
세계의 종말: 이 세계는 절대적 파괴가 아니라 본질의 변화에 의해서 없어질 것이다. 지나가는 것은 형적이요 본성이 아니다.(20.14) 전면적 화재로 인해서 우리의 썩을 몸에 합당하던 썩을 요소들의 속성이 완전히 없어지고, 우리의 본질은 새로운 속성들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생할 몸과 조화되는 속성들일 것이다. 우주 자체가 갱신되며 개선될 것이므로 그 우주는 역시 갱신되며 개선된 육신을 가진 인류에 적합할 것이다. (20.16)
부활체의 속성: 성도들은 원하는 곳이며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뿐 아니라 그들이 영생하며 썩지 않게 된 때에는 대화재의 불꽃이 그다지 두렵지 않을 것이며, 세 청년이 죽어서 썩을 몸을 가지고도 격렬히 타는 풀무 안에서 상하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과 같다.(20.18)
제21권
두 가지 죽음: 첫째 죽음은 원하지 않는 영혼을 몸에서 축출하고, 둘째 죽음은 원하지 않는 영혼을 몸 안에 가두어 둔다. 양자의 공통점은 원하지 않는 영혼이 자기 몸이 주는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다. (21.3)
몸의 3상태: 인간의 육신은 죄가 있기 전과 죄가 있은 후에 구조가 서로 다르며, 죄가 있기 전에는 죽을 수 없게 생겼고, 죄가 생긴 후에는 지금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죽을 운명의 비참한 상태이며, 영구히 생명을 간직할 수 없다. 그래서 죽은 자들이 부활할 때에는 그 몸이 현재 잘 알려진 상태와는 다르게 될 것이다.(21.8)
영원한 벌: (아무리 중한 죄일지라도 단시일 동안에 지은 것에 대해 영원한 벌을 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대하여,) 벌이 주는 고통도 범행시간만큼 짧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21.11) 인간의 이해력으로 영원한 벌을 가혹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처음 범죄가 얼마나 중대한 것이었는지를 깨달을 만한 지극히 높고 순수한 지혜가 우리 연약한 인간성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얻은 기쁨이 컸으면 컸을수록 하나님을 버린 그의 악행은 더욱 중대한 것이었다.(21.12)
성육신의 목적: 예수는 우리를 그의 신성에 동참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 우리의 죽을 운명에 동참하셨다.(21.16). * 인생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동참하는 것.
만인구원론 비판: 그것은 그리스도교인의 마음이 인정에 끌리기 때문에 저지르는 것이다. 그들은 최후 심판에서 정죄되는 사람들이 받는 고통은 일시적인 것이며, 조만간 자유를 얻게 되어 모두 영원한 복락을 누리리라고 믿는다. 이 견해가 자비롭기 때문에 좋고 바른 것이라면, 더 자비로울수록 더 좋고 더 바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자기의 견해가 가장 관대하다고 생각할수록 그의 오류는 분명히 그만큼 더 추악하며,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을 반대하는 점에서 그만큼 패악할 것이다.(21.17) 악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하나님 말씀은 옳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심판 때가 오면 자비가 더 우세하리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자비하신 하나님이 성도들의 기도와 중보기도를 들어주시고 그들을 용서하시겠기 때문이라고 한다.(21.18) 그러나 최후심판에서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선고를 하시리라고 예언하셨고(마 25:41), 마귀와 그 천사들이 영영한 불에서 타리라는 것을 여기서 명백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계시록에도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 하였다. 앞의 구절에서는 ‘영영한’, 뒤의 구절에서는 ‘세세토록’이라고 했는데, 이 말들은 성경에서 끝없이 계속한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그러므로 영벌은 오래 계속되는 벌이며, 영생은 끝없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공상인가? 그리스도께서 그 구절에서 같은 용어와 한 문장으로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는 말씀으로 벌과 생명이 다 영원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25:46). 두 가지 운명이 다 영원하다면 다 오래 계속하다가 결국은 끝나리라고 하든지, 다 끝이 없으리라고 해석해야 한다. 표현이 같으므로 한편의 벌도 영원하고, 다른 편의 생명도 영원하다는 것이다. 한 문장에서 영생은 끝이 없고, 영벌은 끝이 있으리라고 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영생에 끝이 없는 것과 같이, 정죄된 자들의 영벌에도 끝이 없을 것이다.(21.23)
악한 행위와 구원: 끝까지 정통교회 안에 머물러 친교를 계속하며,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 말씀으로 자기를 위로할지라도, 벌을 받을 타락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으리라는 자신을 가져서는 안된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한 죄들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버렸다. 따라서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나라에 있을 수 없으므로 영원한 벌 이외에 있을 것이 없을 것이다.(21.25)
제22권
하나님의 도성에서의 생명과 양식: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존재와 행복의 원천, 즉 그들의 공통된 생명과 양식이시다.(22.1)
악의 허용의 이유: 악이 생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보다 악에서 선을 만들어내는 것이 자신의 권능과 인자에 더 합당하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22.1)
하나님의 원하심과 행하심의 괴리: 하나님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거룩한 뜻으로 원하기는 하지만 실현되지 않는 일이 많다. 예컨대, 성도들은 어떤 개인들을 위해서 경건하고 거룩하게 기도하지만, 하나님 자신이 성령을 통해서 그들 안에 그런 기도를 일으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소원을 이루시지는 않으신다. 따라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며 기도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뜻하시지만 행하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22.2)
유용성과 아름다움: 남자의 젖꼭지나 수염과 같이, 몸에 있는 어떤 것은 유용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위해서 있는 것이 분명하다. 수염이 보호용이라면, 여자는 약하므로 그런 보호가 필요할 터이지만 여자의 얼굴에 수염이 없다는 것은 장식을 위한 것이며, 보호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증명이 된다. ...그러므로 인체를 창조하실 때에 유용성 보다 아름다움이 더 중요시되었다는 결론이 된다. 참으로 유용성은 일시적인 것이며, 우리가 아무런 정욕도 느끼지 않고 서로의 아름다움을 즐길 때가 올 것이다. (22.24)
종말시의 몸의 생명: 그 때에는 하나님의 지혜를 그 원천에서 마음껏 기꺼이 마실 것이므로 노고나 오류가 없이, 모든 것을 확실히 알 것이다. 몸은 모든 점에서 영에 순종하며 풍족한 생명을 영에서 얻어 다른 영양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므로 얼마나 놀랍겠는가?(22.24)
의지와 죄: 처음에 사람이 고결한 자로 창조되었을 때에 받은 의지의 자유는 죄를 짓지 않는 능력과 동시에 죄를 짓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의지의 마지막 자유는 훨씬 더 강력한 것이어서 죄를 지을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있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일 것이다. ...하나님은 본성 때문에 죄를 지으실 수 없지만 하나님께 동참하는 자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다. ... 하나님의 선물에는 단계가 있다. 즉 처음에 받은 자유의지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고, 마지막에 받은 자유의지로는 죄를 지을 수 없다. ... 하나님의 도성에서 영혼은 과거의 악을 지식적으로 기억하고 있겠지만 감각적 경험으로서는 아주 잊어버릴 것이다.... 만일 과거의 불행을 모른다면 어떻게 시인이 말하듯이, 하나님의 자비를 영원히 노래할 수 있겠는가?(시 89:1) 참으로 그 도성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려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은혜를 찬양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을 것이다.(22.30)
영원한 삶: 그 때에 우리는 쉬면서 보며, 보면서 사랑하며, 사랑하면서 찬양할 것이다. 끝없는 나라에 도달하는 것 이외에 무엇이 우리의 끝이며 목표인가?
1. 저술동기
이교도들이 로마가 당한 약탈과 재앙에 대해서 그리스도교에 책임을 돌리며, 참 하나님을 모독하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집에 대한 열정에 불타서 그들의 모독과 거짓말을 반박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도성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retractations, 2, 43, 2)
2. 두 도성에 대한 정의
나는 인류를 두 부분으로 분류한다. 하나는 인간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구성된 부분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로 구성된 부분이다. . . 나는 두 도성이란 말로서 두 부류의 인간사회를 의미하는데, 하나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도록 예정된 도성이며, 다른 하나는 악마와 함께 영벌을 겪을 운명을 지고 있는 도성이다.(15권 1장, 이하 15.1로 표기)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아를 경멸하게 되고, 자아를 사랑하면 하나님을 경멸하도록 이끈다.(14.28) 그러므로 두 도성은 두 종류의 사랑이며, 이는 외적이고 정치적인 구분이 아니라 내적이며 영적인 차이이다.
하나님의 도성은 가시적인 제도로서의 교회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 중에는 성례전에 참여함으로써 연합하지만 성도들의 영원한 목적지에는 함께 하지 못할”(1.35)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그 도성의 적 중에도 “시민이 될” 사람이 있다. 이들은 회개하게 될 사람들이다. 가시적인 도성 밖에 있으나 하나님의 도성에 속하게 된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개인적인 계시를 받았음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3. 하나님의 도성의 문체
아우구스티누스는 산문작가로 보다는 수사학자로 훈련받았기 때문에 절제감이나 균형감을 거의 갖고 있지 못했다. 그의 모든 저작은 중심주제로부터 벗어나 빗나간 이야기를 한다. 하나님의 도성도 마찬가지로 단일한 저작이라기보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거대한 중심주제 위에서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중단을 겪으면서 구성된 일련의 감상이다.
4. 저술시기
알라릭이 410년 8월 24일 로마에 입성함. 413년에 하나님의 도성을 저술하기 시작.
제1권
섭리와 재앙: 하나님은 섭리로써 재앙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올바르고 칭찬받을 만하게 살아가도록 훈련시키신다. 또 전쟁을 사용하여 계속적으로 인간의 타락한 품성을 교정시키고 정결케 하신다. (1.1) 하나님은 섭리로서 의인들을 위해서는 불의한 자가 누리지 못할 장래의 축복을, 또 악인들을 위해서는 선인이 당하지 않을 슬픔을 예비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현세의 좋은 일들과 나쁜 일들은 선인과 악인에게 동시에 임하도록 의도하셨다. 그래서 악인들도 동일하게 향유하는 모습을 보이는 어떤 것들을 우리가 지나치게 탐하지 않게 하고, 또한 심지어 선인들도 종종 겪는 해악으로부터 지나친 두려움을 가지고 움츠러들지 않도록 하셨다.(1.8)
선인과 악인의 태도의 차이: 선인들은 이 세상의 좋은 일들로 인하여 의기양양해 하지도 않고, 이 세상의 나쁜 일들로 인하여 압도당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악인은 현세의 행운에 의하여 타락해 있기 때문에 불행에 의해서는 자신이 징벌 받는다고 느낀다.(1.8)
심판의 지연의 유익: 이 세상에서의 모든 악행에 대하여 명백하게 벌이 가해진다면 마지막 심판을 위하여 남겨질 것이 하나도 없게 될 것이다... 그분께 구하기만 하면 번영을 베풀어 주시는 경우에는 하나님이 단지 그런 보상을 위해서만 섬김 받을 수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그분을 섬김으로써 경건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탐욕스럽고 욕심만 많이 가지게 될 것이다.(1.8)
선인과 악인의 고통의 차이: 선인과 악인이 함께 고통당하며 또 그들이 당하는 고통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 사이에 결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고통이 비록 같을지라도 고통 받는 사람들은 여전히 다른 채로 남아 있다. 덕과 악덕은 비록 같은 괴로움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동일하지 않다... 선인들을 검증하고 정결케 하고 순수하게 하기 위하여 엄습하는 난폭한 일이 악인들을 저주하고 파멸시키고 근절시키도록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똑같은 고난을 당할 때 선인들은 기도하고 찬양하는 반면 악인들은 하나님을 증오하고 모독한다. 이로 보아 우리는 고난당하는 자의 본성이 중요하지, 고난의 본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구정물통을 흔들어 보아라. 더러운 악취가 풍길 것이다. 향료를 흔들어 보아라. 똑같은 동작이지만 이때에는 향기로운 내음이 솟아오를 것이다.(1.8)
고난의 원인: 하나님이 현세적인 재난으로 도덕적인 타락을 징벌하기로 결정했을 때, 선인이 악인과 함께 징벌당하는 주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즉 선인과 악인은 둘 다 악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둘 다 비록 정도는 다르다 할지라도 현세적인 생활을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징벌 받는 것이다. 이와 달리 선인은 현세적인 삶을 경멸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교훈을 얻어 마음을 고쳐먹고 영원한 삶을 목표로 할 수 있도록 했어야 했다.(1.9)
고난과 검증: 고난을 통하여 인간의 영혼이 검증되며,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 어느 정도로 순수한지 각자 스스로의 힘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1.9)
죽음에 대한 태도: 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다면, 죽음은 재앙으로 간주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을 좋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죽음 이후에 받게 되는 응보이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죽어야 하는 인간들은 어떤 사건으로 죽느냐에 대하여 지나치게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염려해야 할 것은 죽음 이후에 다다를 목적지가 어디냐 이다.(1.11)
두 도성의 분리: 두 도성은 이 시기에 결합되고 혼재되어 있으면서 최후의 심판으로 분리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1.35)
제4권
덕성에 대한 시금석: 의로운 사람에게는 불의한 지배자가 부과하는 모든 해악은 죄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덕성에 대한 시금석이다.(4.3)
해적과 알렉산더 대왕의 차이: 알렉산더 대왕이 해적에게 무슨 의도로 바다에서 남을 괴롭히는 짓을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거침없이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것은 당신이 온 세상을 괴롭히는 의도와 같습니다. 단지 저는 작은 배를 가지고 그런 짓을 하므로 해적이라고 불리고, 당신은 큰 함대를 가지고 그런 짓을 하므로 황제라고 불리는 차이가 있을 따름입니다.”(4.4)
왕국의 규모에 대하여: 만약 모든 왕국이 소규모이고 이웃과 조화롭게 기쁨을 나누었더라면, 인간사는 보다 더 행복했을 것이다.(4.15)
제5권
예지와 의지: 우리의 의지 자체는 하나님에게 확실하며 그분의 예지에 의하여 포착되는 바로 그 원인의 질서에 포함되어 있다. 만물의 원인을 미리 알고 계신 분은 분명히 그 원인들 중에 우리의 의지에 대해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5.9) (우리의 의지를 미리 아신다. 그에 따라 행하신다, 그러므로 예지와 자유의지가 둘 다 가능함.) 모든 미래의 일들을 알지 못하는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다.(5.9)
전능성: 하나님이 죽을 수 없다거나 오류에 빠질 수 없다고 말할 때에, 그분의 능력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그에게 아주 불가능하여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의 능력이 감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죽을 수도 없고 오류에 빠질 수도 없는 데도, 분명히 전능하다고 불러도 그 말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그는 의도하지 않는 것을 감수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의도하는 것을 하므로 전능하다고 불리기 때문이다.(5.10)
제8권
하나님의 존재: 그분에게는 존재하는 것과 살아 있는 것이 별개가 아니다. 살아 있는 것과 이해하는 것이 별개가 아니다. 이해하는 것과 지복의 상태에 있는 것이 별개가 아니다. 그분에게는 사는 것과 이해하는 것과 지복의 상태에 있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8.6)
플라톤 철학: 플라톤은 궁극적인 선을 덕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고 결론지었으며, 하나님을 알고 닮는 사람만이 덕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언했다. 그분을 알고 닮는 것만이 지복의 원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 있어서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무형적인 본성을 지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8.8) 플라톤이 하나님에 관해서 가지고 있는 개념을 읽고 들을 때 우리 종교의 진리와 상당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게 된다.(8.11)
제9권
인간, 천사, 짐승: 인간은 짐승과 천사 사이에 중간적이다. 천사는 이성적이며 불멸적인 반면에, 짐승은 비이성적이며 가멸적이다. 인간은 천사보다 열등하며 짐승보다 우월하므로 중간적이다. 인간은 짐승들과는 가멸성을, 천사들과는 합리성을 공유하고 있으므로 이성적이며 가멸적인 생물체이다.(9.13)
중보자의 조건: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중재에는 그분이 죽어야 한다는 것과 그분이 계속적으로 죽음 상태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두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일시적인 죽음을 당하는 동시에 영원한 복을 누림으로써, 일시적인 것을 통해서 죽을 운명을 지닌 존재들과 자신을 일치시켰으며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영원한 상태로 인도할 수 있게 되었다.(9.15) 선한 천사들은 그들 자신이 복되며 불멸적이기 때문에, 비참한 가멸적인 존재들과 복되며 불멸적인 존재들 사이를 중재할 수 없다. (9.15) 불멸하지만 비참한 존재는 그 자신이 비참하므로 우리가 복된 불멸성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중재역할을 할 따름이다. 반면 죽음을 당했으나 복된 중재자는 스스로 죽음을 경험했으므로 죽을 존재들을 불멸하도록 만들며(그분은 부활로써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이셨다) 그 자신이 결코 분리된 적이 없는 복을 비참한 자들에게 부여하기 위하여 중재자가 되었다.(9.15) 나는 그분이 말씀이기 때문에 중보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분은 말씀으로서 최상으로 복되며 최상으로 불멸적인 까닭에 비참한 인간들과는 아주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분은 인간이기 때문에 중보자가 된다.(9.15)
지식의 위험: 마귀(다이몬)들은 지식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단어(다에몬)로부터 그 이름을 얻었던 것이다. ... 지식이 사랑을 결여했을 때 아무 소용이 없고 단지 사람들을 우쭐하게 만들거나 공허한 망상으로 거드름을 피우도록 만든다.(9.20)
선한 천사들이 경멸하는 것: 선한 천사들은 마귀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하여 그토록 자랑하고 있는 유형적이며 일시적인 것들에 대한 온갖 지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런 것들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을 성결케 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들 자신에게 아주 고귀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가슴 속에 불일 듯 타고 있는 거룩한 사랑으로써 비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비교하여 그 아래에 있는 모든 것과 그것에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을 경멸하기 때문이다.(9.22)
제10권
합당한 습관: 심지어 영원한 복과 비교해서는 경멸받을 만한 이 세상의 세속적인 필요사항들과 자그마한 현세적인 이익마저도 하나님으로부터만 추구하게끔 습관을 붙이는 것이 합당하다.(10.14)
마음의 귀와 육적 귀: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그분의 불변하는 진리를 향유하면서 영원토록 복 받은 그분의 사역자들과 사자들의 마음의 귀로 정확하게 들리는 것이지, 육적인 귀로는 들리지 않는다.(10.15)
제11권
천상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의 현재: 천상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은 현세에서는 서로 섞여 있으며 얽혀 있다고 하겠다.(11.1)
악: 원래 악은 그 자체의 본성이 없으며, 선이 없게 된 것을 악이라고 부른다.(11.9) 악의라는 결함은 본성에서 오지 않고 본성에 반대되는 것이며, 사악한 범죄는 창조주에게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서 유래한다.(11.17)
마귀 창조의 목적: 마귀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은 확실히 그가 선을 미워하는 자가 되리라는 것을 모르시지 않았으며, 자기가 그의 사악을 이용해서 이루실 선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시편 저자는 “주께서 이 용을 웃음거리가 되도록 지으셨나이다”라고 한다.(시 104:26, 70인역) 시인이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마귀를 창조하신 순간에는 자기의 인자로 그를 선하게 만드셨지만, 자기의 예지에 의해서 그가 악하게 된 후에도 그를 선용하실 길을 이미 준비하셨다는 점이다.(11.17) 하나님의 조치에 따라 우주의 아름다움은 반대현상과의 대조에 의해서 더욱 찬란하게 된다.(11.18)
하나님의 도성의 기원: 하나님의 도성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것이다. ... 그 도성은 하나님 안에 있음으로써 그 형태를 가졌으며, 하나님을 봄으로써 광명을 얻으며, 하나님 안에 머무름으로써 그 기쁨을 얻는다. 그 도성은 존재하며, 보며, 사랑한다. 하나님의 영원에 그 힘이 있으며, 하나님의 진리에 그 빛이 있으며, 하나님의 선하심에 그 기쁨이 있다. (11.24)
선한 사람: 선한 것을 아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 아니라, 선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다. ... 창조주에게 돌아가면 우리의 존재는 죽음을 모를 것이며, 우리의 지식에는 오류가 없을 것이며, 우리의 사랑에는 실수가 없을 것이다.(11.28)
천사의 두 사회: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니라고 하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빛과 어두움이라고 해석할 것이지만, 우리는 천사들의 두 사회라고 해석한다. (11.33)
제12권
악한 행위의 원인: 행위를 악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의지 자체인데, 무엇이 그 의지를 악하게 만든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악한 행위의 원인은 악한 의지지만, 악한 의지의 원인은 없다. ... 악한 의지는 어떤 악한 피조물 속에 있을 수 없었고, 선하면서도 변할 수 있는 피조물 속에 있었던 것이다. ... 선한 것이 어떻게 악한 의지의 발생 원인이 되겠는가? 선이 어떻게 악의 원인이 되겠는가? 의지가 높은 것을 버리고 낮은 것으로 향할 때 그것은 악하게 되기 때문이다. 의지가 향하는 대상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방향전환 자체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것이 악한 의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뒤집혀서 지나친 욕망으로 낮은 것을 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12.6) 지고의 존재자이신 분을 떠나서 더 낮은 존재로 향하는 것이 악한 의지를 가지게 되는 시초다. (12.7)
변하는 영적 존재에서 악은 악한 의지에서 시작한다. ... 이 의지를 창조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이탈 뿐이다. 이런 이탈 또는 결핍의 원인은 전혀 없다. ... 악한 천사들은 그 선한 의지를 버리고 변했기 때문이다. 선했던 의지를 버렸기 때문에,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의 의지가 악한 것이 분명하다. 또 그들이 선한 의지를 버리는 것을 참으로 원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악의 원인은 선이 아니며 선에서의 이탈이다. (12.9)
바른 사상: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더 쉽게 행복을 얻으리라고 가르치면서 무슨 까닭에 바른 그 사랑이 식게 만드는 사상을 가르치는가?(12.21)
하나 됨: 불화를 고치거나 예방하기 위하여 인간성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논법은 하나님이 조상 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회상하는 것이다. ... 우리는 수는 많아도 마음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회상하게 하셨다. (12.28)
두 도성의 기원: 태초에 창조된 그 처음 사람과 함께 인류 사이에 두 도시 또는 두 사회가 나타났다. 아직 밝히 눈에 보인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예지 안에서는 이미 나타났다. 처음 한 사람에게서 인류가 일어나기로 정해졌으며, 그 일부는 악한 천사들과 짝하여 벌을 받으며 다른 부분은 선한 천사들과 함께 상을 받기로 정해졌다.(12.28)
제13권
죽음의 정의: 영혼이 영생불사한다고 하는 것은 영혼의 생명과 감각은 아무리 미약하게 되어도 결코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대로 몸이 죽는다는 것은 몸에서 생명이 완전히 떠날 수 있으며, 몸 자체에는 독자적인 생명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영혼을 버리시면 영혼이 죽는 것과 같이, 영혼이 몸에서 떠나면 몸은 죽는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영혼이 몸을 떠날 때에는 영혼과 몸, 곧 사람 전체가 죽는다. ... 첫째 사망 곧 몸이 죽는 것은 선한 사람에게는 선이 되며 악한 사람들에게는 악이 된다. 그러나 둘째 사망은 선한 사람들에게는 오지 않는 것이므로 아무에게도 선한 것이 되지 않는다.(13.2)
몸의 생명으로서의 영혼: 영혼이 몸 안에 있으면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든 얻지 못하든 간에 몸은 영혼에게서 생명을 얻는다. ... 영혼은 죽은 때에도 곧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때에도 그들의 몸에 생명을 줄 수 있다. (13.2)
후손들의 죽음의 원인: 처음 사람들은 참으로 죄만 짓지 않았더라면 어떤 종류의 죽음도 당하지 않았을 그런 본성으로 창조되었다. 그들이 처음 죄인이 되었을 때에 사형 언도를 받은 데는 조건이 있었다. 곧 그들에게서 나는 후손들도 모두 같은 벌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그들과 같은 후손만을 낳겠기 때문이다. 그들이 받은 벌은 그들의 엄청난 죄책과 정비례한 것이었으며 그들의 처음 본성을 악화시켰다. 그 결과 처음 사람들의 죄에 대한 벌로써 출발한 것이 그 후손들에게는 타고나는 결과로써 나타난다. ... 그 후로 사람이 낳는 것은 창조된 때의 사람이 아니라 죄를 짓고 벌을 받게 된 때의 인간이었다.(13.3)
율법과 죽음: 율법은 죄인의 악한 욕망을 더하지만 악이 아니며, 이와 같이 죽음은 의인의 영광을 더하지만 선이 아니다. 불의를 위해서 율법을 어기면 범법자가 생기고, 진리를 위해서 죽음을 당하면 순교자가 생긴다. 율법은 죄를 금지하므로 선이며, 죽음은 죄의 삯이기 때문에 악이다. 악인들은 악한 것 뿐 아니라 선한 것도 악용하는 것과 같이 선인들은 선한 것 뿐 아니라 악한 것도 선용한다. 그래서 율법은 좋은 것이지만 악인은 율법을 악용하며, 죽음은 악한 것이지만 선인은 선한 죽음을 죽는다.(13.5)
죄의 첫 번째 벌: 영혼은 이제 자기가 악을 행할 수 있는 그 자유를 기뻐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멸시하기 때문에, 몸이 전과 같이 순종하지 않게 되었다. 자기가 위에 계신 주인을 일부러 떠났으므로 자기 밑에 있는 종이 자기의 뜻에 순종하지 않게 되었다. 영혼이 하나님께 계속 순종했다면 육신도 모든 점에서 영혼에게 계속 순종했을 것이나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13.13)
영과 육: 영이 육의 소욕을 따를 때에 그 영을 육적이라고 하는 것이 부당하지 않다면 육이 영을 섬길 때에 그것을 영적이라고 하는 것도 마땅할 것이다.(13.20)
제14권
육체: 육체의 본질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육체적으로(육적으로) 산다는 것은 확실히 나쁘다. (14.2) 우리는 이 썩을 몸을 짐같이 지고 있다. 이렇게 짐이 되는 것은 신체의 본성이나 본질이 아니라, 그 썩는 성질 때문인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몸을 벗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으로 덧입기를 원하는 것이다.(14.3)
사람을 따라 사는 것,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사람을 따라 살 때에는 마귀와 같다. ... 육신에 속했다고 하는 것과 사람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같은 뜻이다.... 육에 속한(animalis)의 어원인 anima(영혼), 육신에 속한(carnalis)의 어원인 caro(육신)에서 영혼과 육신은 전체인 사람을 가리킨다. (14.4)
악행과 악의: 악한 의지가 먼저 있지 않았더라면 악한 행위에 이를 수 없었을 것이다. 악한 의지의 시초는 교만이다. “교만은 죄의 시작이니라”(집회서 10:13)... 따라서 악행 곧 금지된 음식을 먹었다는 죄는 이미 악하게 된 사람들이 지은 것이었다. 악한 나무만이 악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마 7:18). 그뿐 아니라 나무가 악했다는 것도 본성에 반대되는 사건이었다. 의지가 본성에 반대되는 결함이 없었더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교만한 자들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라고 한다(벧전 2:10). 향상하려는 정신은 좋으나 자기를 향해서 향상하면 교만이 되고, 하나님을 향할 때에는 순종이 된다. 그리고 순종은 겸손한 자만이 할 수 있다... 만일 사람이 이미 자기 만족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면, 마귀는 하나님이 금지하신 일을 한다는 노골적이고 명백한 죄로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 만족에 빠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리라’(창 3:5)는 말을 듣고 기뻐한 것이다. (14.13)
지상도성과 천상도성의 성격: 두 가지 사랑이 두 도시를 건설했다. 하나님까지도 멸시하는 자기 사랑이 지상 도성을 만들었고, 자기를 멸시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천상도성을 만들었다. 따라서 지상도성은 자체를 자랑하며 천상도성은 주를 자랑한다(고후 10:17). 지상 도성은 사람들에게서 영광 받기를 원하고, 천상 도성은 우리의 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최대의 영광으로 여긴다.(14.28)
제15권
인류의 두 부류: 사람의 생각대로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 두 도성이란 두 사회라는 뜻이다. 한 도성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지배하기로 예정되었고, 다른 도성은 마귀와 함께 영원한 벌을 받기로 예정되었다... 가인은 사람의 도성에 속했고, 아벨은 하나님의 도성에 속했다. ...먼저 악하지 않고서 선하게 되는 사람은 없다. ...가인이 도시를 건설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아벨은 나그네였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다. (15.1)
선인과 악인: 지상도성은 하나님이나 신들을 경배하되, 지상에서 승리자로서 평화롭게 지배하는 것을 도와주리라고 기대하며, 선을 행하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배욕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즐기기 위해서 세상을 이용하지만, 악인들은 반대로 세상을 즐기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 한다.
가인과 셋: 가인과 셋의 두 계열은 우리가 논하는 두 도성을 암시한다. 셋의 계열은 지상에 나그네로 있는 천상도성이요, 가인의 계열은 지상적인 기쁨을 탐내며, 그것이 유일한 기쁨인양 거기에 매달리는 지상 도성이다. (15.15)
제18권
성경과 사상서들의 차이: 성경의 저자들의 생각에 서로 상치되는 것이 전혀 없다. 이 사실을 볼 때에 그들이 쓴 것은 하나니이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 또는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믿는 것이 당연하다. ...철학자 가운데는 자기의 주장을 글로 남겨 놓은 사람이 많지만, 그 생각이 서로 완전히 일치하는 두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18.41)
70인역에 대해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둘째 왕 필라델포스는 유대의 포로를 해방. 대제사장 엘리아살에게 성경을 요청. 번역할 사람을 요청. 12지파에서 6명씩 72명이 번역. 다른 곳에서 번역작업을 하게 했는데, 사용한 단어, 단어 배열의 순서까지 일치. 마치 한 사람이 번역한 것 같이 완전히 일치한 사실로 한 성령이 그들 전체 안에 계신 것이다. 성경의 권위를 인간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신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18.42)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에 이스라엘 민족 밖에 천상 도성에 속한 사람이 있었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신 민족은 없었다. 그러나 다른 민족 가운데도 지상적인 인연이 아니라 천상적 인연으로 진정한 이스라엘, 즉 위에 있는 나라의 시민인 사람들이 있었다. 욥이 그 증거이다. 그는 에돔 사람으로서 개종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자기 시대에서 가장 정직하고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칭찬하셨다. (18.47)
그리스도의 죽음과 성령강림일: 주후 29년 3월 25일. 5월 15일. 29년에 대해서는 터툴리안과 락탄티우스도 같은 견해임. (18.54)
지상 도성과 천상 도성의 차이: 지상 도성은 무엇이든지 심지어 사람까지도 거짓 신으로 만들어 제물을 드리면서 숭배했다. 천상 도성은 지상의 순례자로서 거짓 신들을 만들지 않으며, 도리어 참 하나님에게서 창조되며 자신을 참 제물로 바친다. 그러나 두 도성이 다 이 세상에서는 복도 누리고 화도 입는다. 다만 믿음이 다르며, 소망이 다르며, 사랑이 다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최후 심판에서 분리되어 각자의 종국을 맞으며, 거기는 끝이 없다.(18.54)
제19권
최고선과 최고악: 최고선은 선의 완성이요, 최고악은 악의 완전한 발전이다.(19.1) 영원한 생명이 최고선이요 영원한 사망이 최고악이다. 전자를 얻고 후자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바르게 살아야 한다.(19.4)
행복: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은 것 같이 소망으로 행복하게 된다. 우리가 아직 현재의 구원을 가진 것이 아니라 미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이 행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며 여기서는 ‘참음으로’ 기다린다.(19.4)
평화: 천상 도성도 순례 도중에 있는 동안 지상 평화를 이용하며, 신앙과 경건을 해하지 않으면 생활 필수품을 얻는 문제에서 할 수 있는 대로 세상 사람들과 합의하고자 하며, 지상 평화가 천상 평화에 이바지하게 한다.(19.17) 우리에게 특유한 평화를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즐기며, 내세에서는 보면서 그와 함께 즐길 것이다. (19.27)
직위에 대하여: 감독직에 있는 사람은 그 지위에서 지배하는 직분을 품위 있게 이행해야 하지만, 사람들을 지배하는 데에 필요한 그 높은 지위를 탐내는 것은 품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한적함을 사모하는 것은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필요한 사무를 맡는 것은 사랑이 강요하기 때문이다. (19.18) * 사랑 때문에 직분을 맡지만, 맡지 않는 것을 더 사모한다는 것.
제20권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첫째 부활은 지금 있는 것이다. 이 부활은 몸에 관한 것이 아니고 영혼에 관한 것이다. 영혼도 그 죄악 때문에 죽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는 것’은 영혼이 죽은 자들로 몸이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것이다.(20.6) 처음 부활인 영적 부활로 일어나지 않은 자들은 둘째 부활인 몸의 부활을 얻은 후에 다시 둘째 죽음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20.6)
세계의 종말: 이 세계는 절대적 파괴가 아니라 본질의 변화에 의해서 없어질 것이다. 지나가는 것은 형적이요 본성이 아니다.(20.14) 전면적 화재로 인해서 우리의 썩을 몸에 합당하던 썩을 요소들의 속성이 완전히 없어지고, 우리의 본질은 새로운 속성들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생할 몸과 조화되는 속성들일 것이다. 우주 자체가 갱신되며 개선될 것이므로 그 우주는 역시 갱신되며 개선된 육신을 가진 인류에 적합할 것이다. (20.16)
부활체의 속성: 성도들은 원하는 곳이며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뿐 아니라 그들이 영생하며 썩지 않게 된 때에는 대화재의 불꽃이 그다지 두렵지 않을 것이며, 세 청년이 죽어서 썩을 몸을 가지고도 격렬히 타는 풀무 안에서 상하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과 같다.(20.18)
제21권
두 가지 죽음: 첫째 죽음은 원하지 않는 영혼을 몸에서 축출하고, 둘째 죽음은 원하지 않는 영혼을 몸 안에 가두어 둔다. 양자의 공통점은 원하지 않는 영혼이 자기 몸이 주는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다. (21.3)
몸의 3상태: 인간의 육신은 죄가 있기 전과 죄가 있은 후에 구조가 서로 다르며, 죄가 있기 전에는 죽을 수 없게 생겼고, 죄가 생긴 후에는 지금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죽을 운명의 비참한 상태이며, 영구히 생명을 간직할 수 없다. 그래서 죽은 자들이 부활할 때에는 그 몸이 현재 잘 알려진 상태와는 다르게 될 것이다.(21.8)
영원한 벌: (아무리 중한 죄일지라도 단시일 동안에 지은 것에 대해 영원한 벌을 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대하여,) 벌이 주는 고통도 범행시간만큼 짧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21.11) 인간의 이해력으로 영원한 벌을 가혹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처음 범죄가 얼마나 중대한 것이었는지를 깨달을 만한 지극히 높고 순수한 지혜가 우리 연약한 인간성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얻은 기쁨이 컸으면 컸을수록 하나님을 버린 그의 악행은 더욱 중대한 것이었다.(21.12)
성육신의 목적: 예수는 우리를 그의 신성에 동참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 우리의 죽을 운명에 동참하셨다.(21.16). * 인생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동참하는 것.
만인구원론 비판: 그것은 그리스도교인의 마음이 인정에 끌리기 때문에 저지르는 것이다. 그들은 최후 심판에서 정죄되는 사람들이 받는 고통은 일시적인 것이며, 조만간 자유를 얻게 되어 모두 영원한 복락을 누리리라고 믿는다. 이 견해가 자비롭기 때문에 좋고 바른 것이라면, 더 자비로울수록 더 좋고 더 바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자기의 견해가 가장 관대하다고 생각할수록 그의 오류는 분명히 그만큼 더 추악하며,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을 반대하는 점에서 그만큼 패악할 것이다.(21.17) 악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하나님 말씀은 옳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심판 때가 오면 자비가 더 우세하리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자비하신 하나님이 성도들의 기도와 중보기도를 들어주시고 그들을 용서하시겠기 때문이라고 한다.(21.18) 그러나 최후심판에서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선고를 하시리라고 예언하셨고(마 25:41), 마귀와 그 천사들이 영영한 불에서 타리라는 것을 여기서 명백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계시록에도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 하였다. 앞의 구절에서는 ‘영영한’, 뒤의 구절에서는 ‘세세토록’이라고 했는데, 이 말들은 성경에서 끝없이 계속한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그러므로 영벌은 오래 계속되는 벌이며, 영생은 끝없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공상인가? 그리스도께서 그 구절에서 같은 용어와 한 문장으로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는 말씀으로 벌과 생명이 다 영원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25:46). 두 가지 운명이 다 영원하다면 다 오래 계속하다가 결국은 끝나리라고 하든지, 다 끝이 없으리라고 해석해야 한다. 표현이 같으므로 한편의 벌도 영원하고, 다른 편의 생명도 영원하다는 것이다. 한 문장에서 영생은 끝이 없고, 영벌은 끝이 있으리라고 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영생에 끝이 없는 것과 같이, 정죄된 자들의 영벌에도 끝이 없을 것이다.(21.23)
악한 행위와 구원: 끝까지 정통교회 안에 머물러 친교를 계속하며,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 말씀으로 자기를 위로할지라도, 벌을 받을 타락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으리라는 자신을 가져서는 안된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한 죄들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버렸다. 따라서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나라에 있을 수 없으므로 영원한 벌 이외에 있을 것이 없을 것이다.(21.25)
제22권
하나님의 도성에서의 생명과 양식: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존재와 행복의 원천, 즉 그들의 공통된 생명과 양식이시다.(22.1)
악의 허용의 이유: 악이 생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보다 악에서 선을 만들어내는 것이 자신의 권능과 인자에 더 합당하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22.1)
하나님의 원하심과 행하심의 괴리: 하나님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거룩한 뜻으로 원하기는 하지만 실현되지 않는 일이 많다. 예컨대, 성도들은 어떤 개인들을 위해서 경건하고 거룩하게 기도하지만, 하나님 자신이 성령을 통해서 그들 안에 그런 기도를 일으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소원을 이루시지는 않으신다. 따라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며 기도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뜻하시지만 행하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22.2)
유용성과 아름다움: 남자의 젖꼭지나 수염과 같이, 몸에 있는 어떤 것은 유용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위해서 있는 것이 분명하다. 수염이 보호용이라면, 여자는 약하므로 그런 보호가 필요할 터이지만 여자의 얼굴에 수염이 없다는 것은 장식을 위한 것이며, 보호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증명이 된다. ...그러므로 인체를 창조하실 때에 유용성 보다 아름다움이 더 중요시되었다는 결론이 된다. 참으로 유용성은 일시적인 것이며, 우리가 아무런 정욕도 느끼지 않고 서로의 아름다움을 즐길 때가 올 것이다. (22.24)
종말시의 몸의 생명: 그 때에는 하나님의 지혜를 그 원천에서 마음껏 기꺼이 마실 것이므로 노고나 오류가 없이, 모든 것을 확실히 알 것이다. 몸은 모든 점에서 영에 순종하며 풍족한 생명을 영에서 얻어 다른 영양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므로 얼마나 놀랍겠는가?(22.24)
의지와 죄: 처음에 사람이 고결한 자로 창조되었을 때에 받은 의지의 자유는 죄를 짓지 않는 능력과 동시에 죄를 짓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의지의 마지막 자유는 훨씬 더 강력한 것이어서 죄를 지을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있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일 것이다. ...하나님은 본성 때문에 죄를 지으실 수 없지만 하나님께 동참하는 자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다. ... 하나님의 선물에는 단계가 있다. 즉 처음에 받은 자유의지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고, 마지막에 받은 자유의지로는 죄를 지을 수 없다. ... 하나님의 도성에서 영혼은 과거의 악을 지식적으로 기억하고 있겠지만 감각적 경험으로서는 아주 잊어버릴 것이다.... 만일 과거의 불행을 모른다면 어떻게 시인이 말하듯이, 하나님의 자비를 영원히 노래할 수 있겠는가?(시 89:1) 참으로 그 도성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려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은혜를 찬양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을 것이다.(22.30)
영원한 삶: 그 때에 우리는 쉬면서 보며, 보면서 사랑하며, 사랑하면서 찬양할 것이다. 끝없는 나라에 도달하는 것 이외에 무엇이 우리의 끝이며 목표인가?
출처 : 제자화선교회
글쓴이 : 신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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