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id Wells. <신학실종>.

경회성 2008. 12. 16. 16:20

David Wells. No Place for Truth. 김재영역. <신학실종>. 부흥과 개혁사, 2006.

 

(*읽으면서 밑줄 친 부분)

 

나는 신학이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속한 지식이며, 신학에 대한 본연의 그리고 일차적인 청중은 지식인 집단이 아니라 교회라고 생각한다. (23)

인간의 성찰이 아무리 탁월하다 해도 신학의 내용은 그저 인간의 성찰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라는 하나님 말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양육받고 훈련받는다. 그리고 신학의 목적은 전문 지식인과의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양육하는 데 있다. 이것이 신학의 본질이며 목적이다. (24)

지금 절대적인 것 대신에 상대적인 것, 하나 대신에 많은 것, 통일성 대신에 다양성, 신적인 것 대신에 인간적인 것, 공적이며 보편적인 진리 대신에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종교체험을 선호하고 있지 않은가?(27)

예를들어, <크리스챠니티 투데이>가 개신교 종교개혁의 핵심 신앙의 하나인 이신칭의 교리를 폐기해 버리면서, 복음주의 신앙을 다시 쓰자는 제안을 실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30)

문화에는 가치관이 내재되어 있다. 문화의 많은 가치관은 우리가 현대에 누리는 문명의 이기를 통해 전달되는 경우조차도 신앙의 본질을 교란시키는 역할을 한다. (32)

솔직히 말해 나는 개신교 정통주의가 보전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현대 세계에 대한 믿음을 배격한다. 많은 복음주의자가 현대 문화의 순수성을 믿고 있고 그런 이유로 현대문화에 탐닉하고 그 문화에 의해 수탈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한때 이 개신교 정통성의 특징을 이루었던 그 진리의 모든 것을 믿을 수 없게 된 것이다. (33)

예전의 정통주의는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추구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정통주의는 신학적인 진리로밖에 표현될 수 없었다. 새로운 복음주의는 진리에 대한 예전의 열정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흔히 새로운 복음주의에는 신학적인 관심이 결핍되어 있다.(33)

포스트모던적이 된다는 것은 때로 개인의 영성에 있어서 동양적이 된다는 것이다. (109)

세속주의는 한 사회 안에서 생겨난, 더 이상 어떤 초월적인 질서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은 전망과 가치를 말한다. 세속화는 이와 같은 가치들을 만들어 내고 공인해 주는 현대화 과정을 말한다. (129)

과거에 서구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던 세 가지 중에서, 전통과 권위는 끊겨져 나갔다. 그리하여 오직 권력만이 남았다. .... 전 세계에서 법을 다루는 법률가의 70% 정도가 미국에서 일하고 있다. 도덕상의 책무와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감각이 결여되면,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법의 이름 아래 일정한 규칙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제는 이 규칙이 과거 가정과 학교와 교회 같은 다른 제도들이 감당하고 있었던 의무를 떠맡게 된 것이다. (136)

진리는 일종의 에티켓이 되었다. 진리에 권위라는 것은 없으며, 올바름에 대한 의식도 전혀 없다. 오늘날의 진리는 어떤 절대적인 것에 닻을 내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진리에 설득력이 있다면, 그 까닭은 우리의 경험이 그 진리에 강력한 설득의 힘을 제공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지만 내일이 되면 우리의 경험이 달라질 수도 있으므로 오늘 설득력이 있는 진리가 내일도 설득력을 가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138)

복음주의 세계에서 신학이 실종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즉 복음주의의 만연된 공허한 예배에서, 믿음의 초점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아에게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심리학적인 설교에서, 신앙의 확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실용주의적인 강조점에서, 문화에 대해 명쾌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한 사고력에서 그리고 신앙의 비합리성 가운데서 신학이 실종된 현상을 볼 수 있다.(148-9)

복음주의 세계는 역사적 개신교 정통성과의 연결고리를 단절하고 있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과거의 정통성을 대신해서 마음 내키는 대로 여러 대안 세력과 임시적인 동맹관계를 형성하고 있다.(150)

신학이라는 말이 교회에서 사용되든 학문세계에서 사용되든 그 뜻이 똑 같아야 되는데, 신학이 이렇게 일관성있게 사용되던 때가 있었다. 그 때 신학은 세 가지의 필수적인 측면을 담고 있었다. 이 점은 교회나 학문 영역 모두에서 마찬가지였다. 곧 신앙고백적 요소, 이 신앙고백에 대한 성찰, 이 처음 두 요소에 기초한 일정한 미덕의 개발이 그것이다. (153)

신앙고백은 theologia, 즉 하나님 백성을 위해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서 모든 신학의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 성찰은 현대 세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지적인 싸움을 내포한다.... 신학의 세 번째 요소는 ... 영성이다. 이 영성은 그 성격에 있어서 도덕적이다. (154-5)

현대라는 시기에 하나님의 객관적인 진리와 시공간의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 것에 대한 공적인 고백이라는 신앙고백은 학문 세계에서 매우 어색한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학문 세계가 계몽주의의 습관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 결과 학문 영역에서 신앙고백은 그 무게를 상실하거나 아예 사라져 버렸다. 일단 신앙고백이 사라져 버리자, 신학적 성찰이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신학적 성찰이 하나님 말씀의 연구라는 분야를 상실하게 되자, 동양적 영성에서 급진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스트 이데올로기에서 환경에 대한 관심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신학 성찰의 주제를 찾게 되었다.(156)

심리치유의 시대가 가져온 만병통치약이 신앙고백을 대신하게 되었다. 설교가 심리학화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의미는 개인화되기 시작했다. 신앙고백은 빠져 버리고, 신학적 성찰은 중로 한 개인의 자아에 대한 생각으로 축소되었다.(156)

사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을 전달해 주었으며, 그 사실을 해석했고, 이 해석에서부터 기독교적인 삶에 미칠 결과를 발전시켰다.... 후일에 한 사람의 신자가 된다는 것은 사도들이 가르쳤던 것을 믿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적 계승은 신약성경의 진리다. 신자는 사도들이 가르쳤던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사도들을 계승했다. 이 계승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교회 권력의 계승이 아니라 교리의 계승이다. (157-9)  

하나님과 그의 성품과 그의 행위와 그의 의지에 대한 사도적 설명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토대를 이룬다. 이 토대 없이는 기독교를 믿는다고 할 수 없다. ....사도들은 왜 이렇게 교리, 즉 가르침의 형태로 틀이 짜여진 교훈을 그처럼 강력하게 보존하고 승인하고 전파하려고 했을까? 그 대답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었다. 오직 이 진리를 알게 됨으로써만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가르침, 이 교리의 중심이며 대상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져지실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만이 진리라고 주장했다. 그 세상은 비교적 최근에 이르기까지 서구사회에서 알고 있었던 것보다는 종교적으로 훨씬 다양한 세상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계교회협의회가 활발하게 뒷받침해주고 있으며, 2차 바티칸공의회 문서가 암묵적으로 뒷받침하는, 전위적인 많은 학자 사이에 개진되는, 오늘날의 종교적 다원성의 경험 때문에 사도적인 신앙공식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주장이 얼마나 외양만 그럴 듯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161)

사도들이 살았던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보다는 작았다. 그러나 그들의 세계에서는 다양한 종교적 주장이 서로 다투고 있었다. 그 속에서 기독교 운동은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신앙이 절대적으로 참되며, 어떤 경쟁자도 기독교의 참됨에 필적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혀 타협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성실성을 성령 하나님이 복 주셨으며, 고대 세계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퍼져 나가도록 하는 데 사용하셨다. ...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그저 상대적인 면에서 참되다고 생각한다. 신약성경의 교훈과 사례와는 다르게,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그리스도와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은 다른 종교를 경쟁자로 보지 않고 서로 적응하고 수용되어야 할 ‘해석들’로 본다. (162)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이 ‘비평 이전’의 시기는 비록 지적인 단순성의 시대는 아니라 해도 순진했던 시기로 보인다. 오늘날의 학문 세계에서는 하나님을 앎의 대상으로 삼는 어떤 인식론에 대해서도 칸트가 제기한 반론과 씨름해야 한다. 그리고 신앙고백을 위해 우리 손에 주어져 있는 기준인 성경의 타당성에 대해 성경 비평이 제기한 엄청난 공격과도 씨름해야 한다. 또한 세상에 오직 단 하나의 참된 종교적 신앙고백이 있을 뿐이라는 것에 대해 거절하는 문화적 다원주의와도 씨름해야 한다.(163)

시드니 미드(Sydney Mead)는 칼빈주의 영성이 지배했던 초기 시대가 지나고 그 뒤를 이어 2차 대각성운동과 더불어 경건주의가 부상되면서 신학의 지위가 격하되었다고 주장했다. 미드는 진리에 대한 열정이 영혼에 대한 열정으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하면서, “19세기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신학은 서서히 파산되었지만, 종교는 번성했다”는 코매이거의 말을 인용했다.(169)

목회학 박사학위는 사실 박사학위가 아니다. 이 학위를 받기 위해 만족시켜야 하는 기준은 사실 목회학 석사(Master of Divinity) 후보생들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밑도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경우는 학문적인 업적 혹은 성취를 통해 전문가로 승격되는 경우가 아니라, 언어적 치장을 통해 승격되는 경우다. ... 전문가로 보여야 할 필요성 때문에, 마술사의 요술지팡이를 한 번 흔듦으로써, 이제는 재충전 코스에 지나지 않는 과정을 박사학위 과정으로 둔갑시켰다. (174-5)

하르나크는 신앙의 본질을 교리에서가 아니라 내적인 경험에서, 신조가 아니라 종교적인 자의식 가운데서 발견하려고 추구했다. 칼 바르트와의 최후의 논쟁에서 그는 명료하게 자기는 더 이상 교리적 기독교를 믿을 수 없으며, 그 기독교는 우리의 내적인 영성에서 나오는 개인적인 신앙고백으로 전부 대체되어야 한다고 진술했다. ... 하르나크의 주장은 곧 ‘교리가 아닌 삶’이란 슬로건 아래 자유주의 교회의 삶 가운데로 전달되었다.(182)

학문 세계에서 신앙고백이 사라지도록 만든 거의 필연적인 원인은 실재를 정의하고 규정하는 것은 주체라는 계몽주의 사상과, 이런 사상을 규범으로 삼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정통신앙고백을 용인하지 않도록 구조화된 대학 사회의 난공불락의 담합에 있다.(186)

이전의 교리적인 언어가 철학적인 언어로 대체되었다....철학적인 언어는 다원주의라는 새로운 요구에 잘 맞아떨어졌다.(187-8)

학문 세계와 자유주의 신학의 세계는 모두 신앙고백을 희생물로 만들었다. 이는 현대성이 그 성격상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진리 주장에 대해서는 아예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학문 세계에서 남게 된 것은 단순히 (신앙고백이 빠진) 신학적인 성찰이며, 복음주의권에서는 (신앙고백이 빠진) 실천뿐이다. (194)

근본주의의 최대 죄악이 타협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복음주의권에서 최대 죄악은 편협함이라고 할 수 있다. (197)

그들이 항상 깎아 내렸던 자유주의자 못지않게 복음주의자들은 이제 생활을 우선시하면서 교리를 내던져 버렸다. (199)

확신의 소멸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이상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확신이라는 것은 늘 통일성이라는 단꿈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200)

복음주의라는 말이 그 신앙고백적 차원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 말은 흔들리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복음주의자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 사람이 무엇을 믿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203)

현대성에는 기독교 교리가 보전될 만한 공간이 거의 없다. 또한 현대성은 신앙고백을 결정적으로 의심하게 만든다. (205)

역사적 개신교에서부터 현대화된 복음주의로의 이행, 그 가운데서 과거에는 문화를 의식적으로 반대했던 복음주의자들이 급격하게 그 문화의 친밀한 동반자가 되고 있다. 바로 이 변천이 신학을 복음주의 생활의 중심 자리에서 언저리로 밀어냈다. 이런 축출은 진리에 대한 감각이 심각하게 무뎌졌기 때문이다. (206)

자아 중심의 신문화는 신학을 전적으로 부적절한 것으로 취급한다.(212)

종교개혁과 계몽주의 이 두 원천은 각각 나름대로의 개인주의를 만들었다.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종교개혁의 개인주의는 인생의 선택과 가치관에 있어서 어떤 궁극적인 것, 즉 하나님께 대한 책임성을 진지하고 강하게 인정하는 사람을 낳았다. 종교개혁에서 파생한 개인주의는 이 세계는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시는 도덕적 세계라는 의식을 통해 국가 권위를 포함해 교회의 권위와 가장 중요하게는 자아의 권위 등의 (하나님의 권위에 대해) 모든 경쟁적인 권위를 피하도록 만든다.
계몽주의에서 파생된 개인주의는 종교개혁의 개인주의와 겉보기에는 비슷하지만, 책임성의 형태에 있어서 확실히 다르다. 18세기와 19세기의 이신론자들은 어떤 궁극적인 심판이 있을 것을 믿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20세기에 들어서 이런 의식은 쇠퇴했다. 현대의 계몽주의 후손은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앉았다. (214)

현대성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도록 만든다. 외부 세계에서 얻는 만족과 성취의 원천을 자신의 자아에서 발견하도록 방향을 재조정하고 있다. 현대성은 현대인으로 하여금 삶을 심리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살도록 강요한다. ...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객관으로부터 주관으로의 이런 이행이, 자아에 대한 이 새로운 집착과 매료가 성경적이며 역사적인 신앙에 대해 항상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215)

이방 종교가 말하듯이 하나님이 피조 된 자연을 통해 구원을 계시하지도 않으시고, 중세 신비주의자들이나 오늘의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인간 본성을 통해서도 계시하지 않으시고, 또한 로마 가톨릭교회가 가르쳤듯이 교회와 교회의 칠대성사를 통해서도 구원을 계시하지도 않으셨으며, 직접적으로 성령과 성경 말씀의 진리의 역사를 통해, 즉 성경 말씀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영적인 상태를 만들어 내시는 성령의 내면적이며 초자연적인 역사로 계시하신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은 혁명적이었다. 개혁자들은 자연이나 인간 본성이나 교회 안에 구원의 은혜를 전달해 주는 어떤 통로가 있다는 모든 주장을 배격했다.(217)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형상됨과 그 형상을 성령이 재창조하시는 역사에 근거해서 한 개인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218)

현대 개인주의의 탄생을 개인의 존엄성 사상에 둔다면, 현대 인본주의의 탄생은 인간의 부패성을 인간의 존엄성에 동반되는 현실로서 인정하지 못한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창조 세계에서 얻게 된 궁극적인 지식에 대한 능력은 죄에 대한 지식이 뒤따르지 못할 때 공포스러운 것이 된다. ... 루소는 인간의 본성이 본래적으로 선하다고 믿었으며, 공리주의자들은 집단적 이기심임에서 덕이 나올 수 있다고 믿었고, 애덤 스미스는 자기 이익을 규제 없이 추구하는 것이 위험함을 보지 못했다.(222)

종교개혁의 기여는 1) 개인은 다른 중간 매개자의 개입 없이 하나님이 기록하신 살아 있는 말씀을 통해 궁극적인 실재에 접근하게 되었으며, 2) 이 진리는 인간성의 부패 현실을 인정하면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고백한 데 있다. ... 인간이 진리에 대해 접근할 수 없게 된 것은 도덕적인 무능함 때문이다. 우리를 제약하고, 우리에게 있는 모든 지식을 항상 왜곡하는 위협을 가하는 것은 인간의 상대성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부패성이다. (224)

오늘날의 자아에로의 함몰 현상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변화는 인간 본성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인간의 개성에 대한 관심에로의 변천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지금 현대인이 기대고 있는 것은 인간 본성이 아니라 인간 개성이며, 복음주의는 단지 이런 문화적 현상의 종교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228-9)

융은 명확히 자기의 의식 저변에 숨어 있는 신이 예수와 반대 되는 것이라고 보았던 반면,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순진하게도 그 의식 저변에서 발견되는 신과 예수님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복음주의자에게는 예수님이 그 의식 저변에 숨어 있는 신이다. 그러므로 숨가쁘게 예수님을 따르는 새로운 추종자들의 내적인 체험에 따라 예수님의 윤곽과 속성이 정의된다. 이런 개인주의가 전개되어 나가는 다음 단계는 우리의 기대와는 정반대다. 개인이 자기의 개별성을 발견하고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개별성을 상실하고 그저 군중 속으로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다. 라인혼드 니버는 자아란 가족과 공동체와 직장 동료들과의 유기적인 관계에서 그 생명력을 흡수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대화는 이런 관계들을 파괴한다. 그리고 즉시 사람들을 자기 속에 함몰시켜서 외부 세계에서 오는 영양공급로를 막아 버린다. 그래서 니버는 ‘현대 문명은 개인을 창조하고 나서 파괴해 버린다’고 말한다. (235)

전체적으로 보면 현대의 개인주의는 전통과 과거의 가치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 완전히 해방된 개인주의다. 심지어 바로 직전의 세대로부터도 자유롭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오늘날의 개인주의는 이런 해방을 포기하고 다른 외적 권위에 굴복했다. 이 외적 권위는 광범위한 문화 속에서 타인처럼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다. (236)

복음주의 신앙의 변모는 19세기 초부터 말까지 전국적으로 발생한 부흥 운동으로 박차를 가해 칼빈주의적 경향에서 전형적인 아르미니우스 주의적 경향으로 신학의 축을 바꾸어 놓았다. ... 복음주의자는 신앙의 확신을 성경 가르침의 객관적 진실성이라는 맥락에서가 아니라 주관적 체험의 효과라는 맥락에서 추구하기 시작했다.(258-9)

많은 은사주의자는 하나님의 진리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근본 토대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자아가 가장 중요하게 되었다. ... 슐러 목사는 천진스런 웃음을 띠면서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진짜 범인은 우리가 자신을 보는 비틀어진 시각에 있다고 말한다. (263)

인간 본성의 완전성을 말하는 이론가들이 모두 인본주의자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이런 전제는 절대로 복음주의 신학이나 복음주의 경건에서 보여서는 안 되는 전제다. 성경의 복음은 이와 정반대다. 즉 자아는 왜곡되어 있고, 자아는 하나님 및 타인과 어그러진 관계를 맺고 있으며, 자아는 속임과 합리화로 가득 차 있고, 자아는 무법하며, 반역적이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자아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268)

어떤 형태로든 금욕주의나 자기부인은 새로운 비도덕이 되었다. 그리고 방종과 방탕이 새로운 복음이 되었다. 그것이 심리학이다. ... 소위 건강과 부요의 복음을 보면, 이 심리학적이고 문화적인 부패에 성령이 새롭게 가세하고 있다. ... 이 복음은 요구하는 것에 대해 엄청난 풍요를 약속하며, 원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을 사람이 온전해지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271)

자아의 자궁에서 잉태된 기독교 신앙은 역사상의 기독교 신앙과 너무 다르다. 그 신앙은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이 축소된 훨씬 작은 신앙이며,... 자아가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제약할 때 선과 악은 행복감이나 불행감으로 전락하며,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위치는 사적인 의식 영역으로 전락하며, 역사 속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속 행위는 개인 구원의 체험에 맞추어지고, 세상 안에서의 하나님의 섭리는 좋은 하루를 보내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축소되며, 하나님의 말씀은 직관으로 대체되고, 확신은 미미한 의견으로 사라져 버린다. 의에 대한 성경적 관심은 행복 추구로, 거룩함에 대한 관심은 자아 통합성에 대한 추구로, 진리에 대한 추구는 감정에 대한 추구로, 윤리에 대한 추구는 자신의 자아에 대한 좋은 감정에 대한 추구로 대체되고 있다. 세계는 개인적 상황의 범위 안으로 축소되며, 신앙 공동체는 개인적인 주변 친구들로 줄어든다. 과거 교회도 세계도 뒤로 물러나고, 남은 것은 자아 뿐이다. (274)

선지자들이 진리의 객관성을 확신했듯이 우리도 확신할 때만 이런 담대한 선지자적인 사고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276)

20~30년 동안 평신도들은 진리를 주요 관심사로 삼는 교리적 신앙에서 심리적인 생존을 주요 관심사로 삼는 치유적 신앙으로 바뀐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 진리는 자체가 목적이 되지 못하고 개인의 치유를 위한 수단으로 변했다.(309)

현대의 섬기는 지도자는 전형적으로 자신의 생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라이며, 대중의 의견에 따라 자신의 확신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이며, 전체의 의사에 복종하며, 그 전체로부터 방향과 입지를 얻고 있는 사람이다. (317)

세상성이란 어떤 문화에서나 타락한 죄인이 중심이 되어 있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죄를 정상으로, 의를 비정상으로 취급하는 가치 체계를 말하기 때문이다.(318)

1912년 워싱턴 글래든(Washington Gladden)은 목사와 활기찬 교회(The Christian Pastor and the Working Church)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진리의 담지자로서 목회자라는 이전의 생각은 모든 사람의 친구로서의 목회자라는 새로운 생각에 길을 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목회 심리학과 목회 임상 운동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반(反)신학 운동의 첫 기지개였는데, 이 바람은 곧 광풍으로 변했다. 교리가 아닌 삶을 주장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은 기독교신앙을 개조하려 했다.(348)

순수하게 성경적이며 하나님 중심적인 목회는 현재 많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자리잡은 자기 몰입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태도와 거의 확실하게 충돌되었다. 이 충돌은 목사의 마음에서 일어나며, 이 일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목사가 자기 경력 쌓는 일을 포기해야 한다. (374)

성경시대에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객관적인 진리였으며, 우리 시대에 결정적인 것도 바로 이 객관적인 진리다.(378)

현대 서구사회의 세속화된 문화는 세상에 하나님이 현존해 계시다는 그 어떤 생각도, 현대인이 의미를 얻는 어떤 신적인 지시체도, 어떤 궁극적인 지식 원천도 배격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초자연적인 것으로 흘러넘친다는 점이 우리 시대의 많은 비정상 가운데 하나다. ... 현대에 이르러 하나님을 비워 버린 오늘날의 세상은 그 자리를 밀고 들어온 초자연적인 것들로 넘쳐나고 있다. (384)

종교의 다원성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경 기록자들이 살았던 주변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의 종교적 다원성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어느 세계보다도 성경 기록자들이 살았던 세계에 접할 수 있게 해 준다. (384)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본질적으로 기독교의 유일무이성을 포기하는 문서를 1990년 바르(Barr)에서 개최되었던 에큐메니칼 회의에서 발행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와 다른 길과 도를 따르는 추종자 가운데서 선함과 진리와 거룩함을 보고 체험하기 때문에, ...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개인적 귀의에만 구원을 제한하는 신학을 넘어 설 필요를 인정한다. ...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역사 가운데서 그리고 다른 종교들을 통해 일하신다고 말한다. (Ecumenical Press Service. 90.09.22)(385,각주) ... 만약 이런 태도가 수많은 다른 종교 앞에서 취해야 할 필연적인 태도였다면, 모세나 이사야, 예수님과 바울이 오늘날 그런 일이 유행하기 이전에 벌써 성경적 신앙을 포기했을 것이다.(385)

그리스도의 부활은 공적이며, 외부적이며, 객관적인, 하나님의 한 행동이었다. ... 성경적인 관점은 하나님의 역사적 행위들의 객관성에 초점이 있으며, 이교적인 관점은 내적이며, 감정적이며, 산만하며, 신비적인 체험의 주관성에 초점이 있다. (393) ... 계시의 좌소는 인간의 상상에 있지 않고, 역사에 있었다. 바로 이 점이 그들의 신앙의 독특성을 보호해 주었다. 왜냐하면 역사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는 계시의 객관성을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394)

시편 기자들이 볼 때, 자연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반영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의도를 계시해 주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현존)도 매개해 주지 못한다. (395)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그리스도를 전파한 것이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다른 많은 종교 형태와 똑같은 종교를 전파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그리스도가 경험하신 것을 전파했다. 그들은 내적으로 흥미로왔던 바를 전파하지 않고 외적으로 사실인 것을 설교했다.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셨다. 이것은 역사에 속하는 이리지, 그저 내면의 인식에 속하는 일이 아니었다. (406)

하나님의 진리가 외적 사건들을 통해 개인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은 그 진리가 객관적이라는 뜻이며, 그 진리가 객관적이라는 뜻은 또한 그 분의 진리가 공적(public)이었다는 뜻이다. (406)

현대 세계의 기본 바탕은 진리가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기독교 의식의 기본 바탕은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객관적이며 공적인 진리, 또한 궁극적인 실재를 반영하는 진리를 믿는 기독교적 전제는 진리가 가변적이라고 믿는 현대 세계의 사고방식과 완전히 반대된다. (409)

현대 지성은 계시의 빛을 거부하는 대신 개인의 사적 체험에서 빛을 구한다. ... 진리란 단지 ‘우리에게’ 참이라고 하는 사고습관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바로 이 역사를 말한다. ...실재를 자아로 축소시킬 때 생기는 맨 처음 문제점은 바로 지성과 관련해서 진리란 인간의 주관적 의식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믿음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객관적 진리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는 것은 신학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과 신학이 판단 받아야 할 기준을 모두 파괴한다. (410-1)

치유 중심의 신학은 기독교 신앙이란 것이 주로 완전히 낫는 것, 영적으로 그리고 아마도 신체적으로 온전해지는 것이라고 제시하며, 이렇게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관계가 진리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제시한다. 그리고 그 신학은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움만큼이나 개인의 행복을 중시한다. (422-3)

교회를 위한 신학이 아니라면 신학이라는 이름값을 할 수 없다. 교회를 위한 신학이란 교회가 그 신학에 활발하게 참여하며, 자체를 신학의 일차적인 청중으로 이해하는 그런 신학이다. ... 학자들의 길드는 본래 신학의 일차적인 청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며, 일반 문화는 신학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를 떠난 신학은 급속도로 그 성격을 상실하게 되어 있다. (426)

이전의 자유주의는 기독교 신앙 내용을 문화의 교리(dogma)에 순응되도록 조정하려는 교묘한 프로그램이었다. 그 근거는 문화의 교리가 하나님의 실재를 기술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실재는 문화 안에 반영되어 있고 문화를 통해 알려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믿음이다.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문화를 본질적으로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 복음주의 역시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 내용들을 문화의 교리에 맞추는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다. (434)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초월성에서 하나님의 내재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 다음에 다음 단계로 나가 하나님의 내재성을 현대성에 우호적인 것으로 해석했다.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으로 보는 전통적인 관점의 상실이 이제 복음주의 세계 도처에서 명백해지고 있다. 대체 어째서 죄와 은혜라는 말이 이처럼 공허한 말이 되어 버렸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