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월요강좌
죽음준비교육 지도자 과정(2007년 3-2학기)
“죽음의 신학적 이해”(영남신대 최태영교수)
1. 죽음을 의식하는 것이 삶을 위해 유익하다.
죽음은 삶에 대한 근본적 위기이기 때문에 흔히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만일 죽음에 긍정적인 면이 없다면 죽음을 삶의 영역에서 격리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죽음을 의식할 수 있느냐에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있다.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한 결정적인 요소가 죽음 의식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삶이 인간다운 삶이다.
죽음을 우리의 의식에서 배제하는 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성서는 우리가 죽음의 현실을 의식하며 살게 한다.
1) 삶의 지혜를 제공한다.
전7:4,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어리석은 자의 마음은 잔치 집에 있다.": 죽음에 대한 의식이 삶의 지혜를 제공한다.
시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죽음을 의식할 때 날을 계수하게 된다. 날을 계수할 때 삶의 지혜가 생긴다.
참되고 영원한 것을 찾게 한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2) 삶을 진지하게 만들어 준다.
삶에 성실하게 만든다. 삶의 제한성, 유일회성, 불가역성에 대한 인식.
만일 죽음이 없다면 만사는 시들하게 되어 삶은 지극히 권태로울 것이다.
“죽음과의 만남을 약속하였을 때 보다 개선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곧 죽을 것이라 예측할 때 더 깊고 열정적인 사랑, 더 풍요한 삶을 살게 된다.”(G. Greshake)
의학이 수명을 연장함으로써 기여하는 게 무엇인가? 죽지 않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죽음은 매우 인간적인 삶의 요소다.
3) 삶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G. Greshake)
죽음은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이르게 한다. 그것은 삶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
4) 성화에 이르게 한다.
신자의 죽음은 성화를 위해 하나님이 정해두신 형벌의 극치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것은 영적인 진보와 하나님나라에 최고의 유익을 끼치는 것이다. 그것은 신자들을 겸손하게 하고, 정욕을 억제하며, 세속적인 마음을 제어하고, 영적인 마음을 촉진한다.(L. Berkhof)
교만에서 겸손으로.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자기 십자가를 지라’(막 8:34).
2. 죽음은 끝이 아니다. (G. Lohfink)
1) 소멸이 아니라 존재양태의 전환이다.
성경은 죽음을 몸과 혼의 분리로 설명한다. (왕상 17:21-22; 전12:7, 약2:26; 요19:30) 이것은 죽음으로 존재가 소멸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육체의 죽음은 결코 소멸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 중 어떤 것도 없애지 않으심. 삶과 죽음은 존재와 비존재로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서로 다른 존재의 양태로서만 대립하는 것이다.(L. Berkhof)
2) 죽음이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존재 양식의 변화라면, 육체의 죽음은 삶의 마지막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죽음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만일 죽음이 최종적인 실재라면 모든 것은 무의미하며, 좌절과 허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두 가지 모델: 영혼불멸사상(그리스)과 부활사상(그리스도교).
3) 개인의 삶의 완성이다.
죽음은 끝(finis)인 동시에 완성(telos)이다.
죽음이 삶을 완성에로 이끌어간다. 죽음은 삶을 자기 안에 담고 삶 전체를 자기 안에 모은다. (흩어져 있던 삶의 모든 파편들이 죽음을 통해 한 곳으로 모인다) (G. Greshake)
인생이라는 작품의 완성. 그림은 완성을 향해 그려진다. 인생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다 그 끝에 이른 것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으로 인생이 완성된다.
죽음에서 인간의 정체성이 완결된 모습으로 나타나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된다.
3. 죽음의 3가지 개념(L. Boettner)
영적 죽음(spiritual death, mors spiritualis)
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 mors corporalis)
영원한 죽음(eternal death, mors aeterna)
영적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을 가리킨다.
육체적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을 가리킨다.
영원한 죽음은 육체의 죽음의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영원히 끊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두 가지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1) 죄의 길: 영적 죽음(원죄) ---> 육체적 죽음 = 영원한 죽음(영벌, 지옥, 둘째 사망)
2) 의의 길: 영적 죽음(원죄) ---> 중생(거듭남) ---> 육체적 죽음 ---> 부활 = 영생(하나님 나라)
그러므로 구원 얻은 자와 불신자의 죽음의 경험은 다르다.
전자에게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나는 사건이 되고, (빛의 경험. 지복. 영생)
후자에게는 하나님을 영원히 상실하는 사건이 된다. (어둠의 경험. 저주. 영벌)
4. 죽음은 자연적이면서 죄의 결과다. (K. Rahner, K. Barth)
죽음과 자연: 죽음은 자연현상인가, 아니면 죄의 벌인가?
죽음은 원래 자연현상이었으나 죄로 인하여 형벌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죽음을 자연현상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나, 그것으로만은 성경을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죄와 죽음을 연관시키고,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기 때문이다.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죽음은
1) 자연현상: 수를 다하고 죽는 죽음은 인간의 피조성에 속한다.
전 3:1-2,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욥 5:26, “때가 되면 곡식단이 타작마당으로 가듯이, 너도 장수를 누리다가 수명이 다 차면 무덤으로 들어갈 것이다.”
사 65:20, “거기서는 몇 날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없을 것이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2) 죽음은 죄의 벌.
창 2:17; 3:19(정녕 죽을 것,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
계 20:14(죽음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울 것, 새 하늘, 새 땅에는 죽음이 없다.)
고전 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죽음”
롬 5:12,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
롬 8:10,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다”
대부분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죽음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의 결과중의 하나다.
3) 결론:
생물학적 차원에서 죽음은 긍정적이다.
영적인 차원(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부정적이다.
육체의 죽음 그 자체는 자연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죄로 말미암아 영적인 죽음이 추가되었고, 그것은 추가된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영적인 죽음이 죽음의 주된 의미가 되었다.
5. 죽음의 극복은 장생불사(長生不死)가 아니라 부활(復活)이다.
죽음(피안)에 대한 공포는 공허한 차안 체험에서 일어난다. 이것은 하나님 없이 자기가 주인 되는 삶(죄)에서 경험된다. 자기의 모든 소유(정체)가 상실되는 경험.
죽음의 참된 극복은 죽음의 제거가 아니라 죽음을 초월하는 희망을 통해서 일어난다. 부활에 대한 희망이 죽음의 쏘는 것을 분쇄한다.
부활은 삶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삶의 연장 곧 不死를 꿈꾸었던 진시황의 오류.
부활은 죽음 안에서 일어난다. 구원 얻은 자에게 죽음은 부활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6.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육체적 죽음의 의미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정복하고 파괴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함.
히 2:14-15,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딤후 1:10,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로서 죽음에 대하여 승리하셨다.
롬 6:9,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승리하셨다면, 우리는 왜 또 죽어야 하는가?
Heidelberg Catechism 42번, “우리의 죽음은 죄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고 영생에 들어가기 위한 문이다.” 여기서 죄에 대한 죽음이란 죄짓는 일을 끝낸다는 뜻으로 보인다.
죽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고전 15:36: 씨는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한다.
42-44 썩은 것 -- 썩지 아니할 것
욕된 것 -- 영광스러운 것
약한 것 -- 강한 것
육의 몸 -- 신령한 몸
고후 5:1ff: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함.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최후의 원수, 최대의 적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문으로 파악해야 한다.
우리의 가장 두려워하는 대적자가 우리를 위해 하늘의 복락에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하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새로운 시작이다. 우리의 최후의 적(고전 15:26)인 죽음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의 친구가 되었다.(A. A. Hoekema)
죽음은 본질적으로는 친구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죽음의 가시와 권세는 제거되어 있다.(O. Cullmann)
죽음은 정복된 적(conquered enemy). 과거에는 원수였으나 지금은 주님의 뜻을 행하게 하는 적이 되었다.(M. J. Erickson)
빌 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 신자의 죽음에 대한 성경의 언급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심 (시 116:15)
천사들에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감(눅 16:22)
낙원 (눅 23:43)
거할 곳이 많이 있는 집 (아버지의 집) (요 14:2)
의의 면류관을 향한 떠남(딤후 4:6-8)
주와 함께 거함 (빌 1:23; 고후 5:8)
주 안에서 잠자다 (살전 4:13)
더욱 좋은 것 (빌 1:23)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4:13)
7. 삶 보다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선한 죽음이 있다.
예수님의 죽음: 순교. 순교적 죽음이 가장 의미 있다. 만일 예수께서 장수하여 늙어 죽으셨다면 구원의 의미가 있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을 수 있다.
바울: 죽는 것과 사는 것 사이의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 죽음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순교자, 순국열사.
죽음이 최선의 삶이 될 수 있다.
<참고문헌>
Gisbert Greshake. Staerker als der Tod. 심상태역. 『종말신앙』. 성바오로출판사, 1980.
J. Moltmann. Das Kommen Gottes. 김균진역. 『오시는 하나님』. 대한기독교서회, 1997.
최태영. 『그리스도인은 죽을 때 부활한다』. 아름다운사람들, 2000.
A. A. Hoekema. The Bible & the Future. 유호준역. 『개혁주의 종말론』. 기독교문서선교회
김균진. 『죽음의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L. Boettner. Immortality. 김선운역. 『불멸의생명』. 개혁주의신행협회.
O. Cullmann 외. 전경연편. 『영혼불멸과 죽은자의 부활』. 복음주의신학총서.
Gerhard Lohfink. Der Tod ist nicht das letzte Wort. 신교선, 이석재공역.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 성바오로출판사, 1993.
Herbert Vorgrimler. Der Tod. 심상태역. 『죽음』. 성바오로출판사, 1982.
<생각하기>
* 죽음을 통하여 현세의 삶이 끝남에도 불구하고 현세의 삶은 어떤 가치, 의미가 있는가?
* 죽음을 의식하며 사는 방법?
* 죽음에 초연했던 소크라테스와 죽음 앞에 전전긍긍했던 예수님 사이에서 신자들의 바른 태도는 무엇일까? (O. Cullmann의 견해를 참고)
* 사는 것 보다 나은 죽음의 예를 들고 설명해 보라. 경험적으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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