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양원의 나무들을 부러워 함
최태영 교수.
소록도와 애양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한센병자들에 초점을 두면 소록도에 마음이 기울고, 손양원 목사님을 생각하니 애양원에 마음이 기울어지는데, 쓸데없는 고민을 며칠 하다가 애양원을 택했다. 그것이 한국신학을 하는데 약간이라도 더 도움이 되리라 하는 얄팍한 계산도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이 선택이 훌륭했다는 자평을 한다. 소록도로 선택했으면 안 될 이유는 하나도 없었지만 애양원에서 얻은 것이 너무나 컸으니까 하는 말이다.
애양원에 가기 전에 사전지식을 얻기 위해 인터넷도 들여다보고 손양원 목사님의 따님의 간증도 들어보면서 수련회 분위기를 좀 키웠다. 그 덕분인지 애양원에 들어서는 길목에 이르니 벌써 감동이 오기 시작했다. 애양원으로 가는 길가에 서 있는, 적어도 수령 백년은 되어 보이는 나무를 보는 순간 이 나무는 우리의 신앙의 선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나무는 손양원 목사님을 보았을 것이고, 순교한 그 두 아들들도 보았을 것이다. 손 목사님이 이 길을 걸으시며 하시는 말씀도 들었을 것이고, 장차 순교할 아이들이 뛰어 다니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 이 나무가 증언을 한다면 손양원 목사님의 신앙과 삶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마구 떠올랐다. 현대과학이 아직도 나무의 증언을 번역해 줄 수 있는 그런 기계 하나도 발명하지 못하나 하는 한심스러운 생각이 건방지게도 내 머리 속으로 기어 올라왔다.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는 나무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할 수 없이 인간의 증언에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아쉬워하면서, 애양원 이곳저곳을, 손 목사님의 흔적을 찾으며 두리번거렸다.
손 목사님의 삶의 흔적이 묻어 있을 한센병 교우들의 얼굴을 바라보기도 하고, 손 목사님의 신발 자국이 숨어 있을 산과 바닷가를 거닐어 보며, 그리고 손 목사님 순교기념관을 관람한 후, 담임하시는 이광일 목사님의 특강과 또 손 목사님의 산증인이신 양재평 장로님의 간증을 들었다. 이 목사님은 손 목사님을 한마디로 자기를 죽이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자기를 통해서 예수님만이 온전히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자기를 죽이기에 힘쓴 사람이었단다. 역대 목회자들과 달리 한센병자들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차라리 당신도 한센병이 들어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실 만큼 그들과 하나가 되어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거기에 있음을 잘 설명해 주셨다. 손 목사님이 사랑의 사도가 된 것은 자기를 죽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감동적이었다. 한센병자들에게 대한 사랑은 손 목사님의 천부적 사랑이 아니라 그를 통해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이었다.
그렇게 알고 보니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별 것이 아니다. 무슨 기이한 비결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선생께서 이미 다 말씀해 주신 것이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신앙생활이란 내가 죽는 것이며,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나를 내어놓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잘 배우고 알고 있는 바였다. 손양원 목사님과 우리의 차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 알고 모르는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고 안하는 실천에 있었다.
손 목사님의 가장 큰 교훈은 순교신앙이었다. 신앙의 목적은 잘 살기 위한 것인데, 어떻게 순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신앙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역설적인 진리다. 손 목사님은 마지못해 순교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교훈을 배운 두 아들들도 불가피하게 순교당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순교를 향해 뛰어 들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바로 종말신앙이었다. 나는 평소 종말론에 관심이 많았지만 이번에 손양원 목사님이라는 참으로 종말론적 신앙으로 살았던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의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대한 사모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사랑이 손 목사님으로 하여금 기꺼이 순교의 길로 나아가게 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적으로 불행한 운명을 살고 있는 한센병자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열렬한 소망이 하나로 어우러진 신앙 그것이 바로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신앙임을 배웠을 때, 나는 이번 수련회에 하나님께서 참으로 귀한 은혜를 내려 주셨다고 고백하는 감격을 가슴에 안고 돌아올 수 있었다. 애양원을 나오며 길가에 서 있는 말없는 나무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너희들이 손양원 목사님으로부터 배운 것이 이것이 아니더냐? 나무들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멀었습니다. 다음에 또 와서 배우십시오.” 끝.
(2003년 5월 23일 신대원 신앙수련회 인솔 후 쓴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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