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산책길에 만난 개

경회성 2007. 1. 21. 20:16

(*  옛날에 쓴 글을 옮겼음. 영남대 옆 한라아파트 살 때의 일입니다.)

 

오랜만에 저녁에 영남대학교로 산책을 나갔다. 몇 달 만인 것 같다. 비 온 후의 공기가 상쾌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어떤 남자가 큰 개를 목에 끈을 매고 데리고 와서 함께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개가 작은 개를 만났다. 작은 개를 만나자 그 덩치 큰 개는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작은 개가 호기심으로 가까이 접근했다가 겁을 먹고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큰 개는 계속 으르렁거리며 작은 개를 물어뜯어 보려는 듯 따라가기 시작했다. 주인인 남자가 힘을 다해 끌어당기며 큰 개의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작은 개는 실은 그렇게 작은 강아지는 아니었다. 제법 중간 크기의 개였다. 그러나 저쪽 개가 워낙 컸기 때문에 싸움 상대는 될 수 없었다. 하여튼 이 작은 개는 도망을 다녔지만 가는 곳마다 큰 개가 위협하며 따라오니 우왕좌왕 하던 중 다행히 나를 발견하고는 옆에 바짝 다가오는 게 아닌가. 아마 그 작은 개는 내가 자기보다 훨씬 키가 크고 또 사람이니까 자기의 보호자가 될 만하다고 생각했던 가 보다. 그 개는 마치 내가 자기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내 다리에 찰싹 붙듯이 따라 다니며 자기를 공격하는 그 큰 개를 부지런히 뒤돌아보며 경계하고 있는 것이었다. 큰 개를 향해서 이봐, 이 아저씨가 우리 주인이야, 너 까불면 우리 주인 아저씨한테 혼난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매우 불편했다. 왜냐하면 나는 개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6살 때 큰 개한테 허벅지를 물려 기겁을 한 이후 강아지만 보아도 다리가 후둘 후둘 떨리는 증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큰 개뿐만 아니라 지금 내 옆에 붙어 있는 이 작은 개도 너무나 무서웠다. 그러나 위험에 처한 작은 개를 내몰라라 하고 쫓아 낼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한 동안 큰 개는 작은 개를 위협하며 따라 오고, 작은 개는 나를 방패삼아 내 옆에 밀착해서 마치 다정한 주인과 개인 양 이렇게 한 참을 동행하게 되었다. 큰 개의 주인도 이 사태를 끝내 보려고 개 끈을 있는 힘을 다해서 당겨 보았지만 여의치 못해 고전하고 있었다. 마침 큰 자동차가 주차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재빨리 자동차 뒤로 숨으니 작은 개도 나를 따라 숨는 것이 아닌가? 꼭 무슨 숨바꼭질 하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하여튼 이리하여 우리는 가까스로 큰 개를 따돌리게 되었다. 큰 개는 씩씩거리며 이따금씩 뒤돌아보며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만 자기 주인이 끄는 대로 다른 방향으로 멀리 사라져 갔다.


이제 나도 작은 개와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더 이상 동행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원래 함께 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 나는 이 개가 무서웠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작은 개는 마치 은혜를 잊지 않으려는 양 내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계속 나를 졸졸 따라 오는 것이었다. 불안한 중에 가만히 보니 이 개는 상당히 잘 생긴 얼굴에다 몸매도 제법 잘 빠져 있었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탐을 낼 만한 물건이었다. 개새끼를 엄청 좋아하는 우리 딸 생각도 났다. 그 애가 지금 여기 있었다면 이게 웬 횡재냐 하며 좋아했을 것이다. 보신탕 주인아저씨였어도 오늘 일진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나는 강아지가 반경 3m 안에만 들어와도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이 개는 자기가 무슨 의리의 사나이라고 죽자하고 나를 따라 오는 것이었다. 마음 한 켠에는 대견스럽기도 하고 또 불쌍하기도 하였다. 잘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개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 지금까지 개에 대해 좀 알아  보려고 하지도 않았었다. 개는 생각만 해도 불안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계속 따라 오는 개는 나를 정말 난처해지게 만들었다. 이쯤에서 결단하고 관계를 끊어야 했다.


내가 드디어 걸음을 멈추니 그 개도 멈추어 나를 올려보았다. ‘문득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하는 성경 사건이 생각났다. 이럴 때 내가 이 개에게 뭔가 좋은 것을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놈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고 무엇이 개가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니 나는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었다. 약간의 동정심을 내다 버리며 나는 단호하게 그 개에게 알아들으라고 말했다. “너 더 이상 나를 따라 오지 마라. 너의 집으로 가라. 자꾸 따라오면 나 화낸다. 화내면 무섭다, 너. 그러니 제발 그만 너의 집으로 돌아가라.” 그렇게 단단히 일러 놓고 살그머니 몇 발짝 떼며 뒤돌아보니 이 저녁이 그냥 따라 올 기세였다. 나는 다시 딱 멈추고 뒤돌아 서서 얼굴에 험한 인상을 쓰면서, 삿대질을 하면서, 발로 한 번 위협을 하면서, 따라 오지 마라고 다시 한번 힘주어 말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참을 걸어 온 후 궁금해서 살짝 뒤돌아보았다. 그 녀석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이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한없이 안되고 슬픈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야무지게 먹었다. 너는 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사귀어 본 적도 없고, 어떻게 잘 해 줄 줄도 모르니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하고 스스로 변호하며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아, 나는 무정한 사람이었다. 제발 그 작은 개가 자기 있을 곳으로 잘 찾아가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2003.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