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학이란?
1. 신학이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신학은 하나의 학문으로서 하나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성경에서 아는 것은 지적(知的)이면서 동시에 경험적(經驗的)인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1.1. 어원
신학(theology)이란 말은 원래 그리스인들이 자기들의 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의미하는 데 사용한 용어인데, 그것을 기독교가 받아들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학문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다가, 오늘날에는 교의학, 또는 조직신학 뿐 아니라, 성경학, 교회사, 실천신학 등 신학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신학은 라틴어 데올로기아(theologia)의 번역인데, 이는 데오스(θεὀ?)와 로기아(λόϒια)라는 그리스어의 합성어이다. 데오스는 신(神),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로기아는 말, 이야기라는 뜻이다. 여기서 신학의 어원적 의미 두 가지를 추정할 수 있다. 즉 데오스를 주어로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데오스를 목적어로 보면 하나님에 관해서 인간이 하는 말이 된다. 어느 쪽이 맞을까?
오늘날 신학은 사실상 후자의 의미로만 사용한다.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하는 말이다. 그러나 전자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즉 신학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근거하여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학은 어원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깊은 연관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성경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듣고 기록하고, 그리고 교회가 공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 성경이다. 그렇다면 신학의 근거는 무엇보다도 성경임을 알 수 있다. 현대의 신학은 신학의 개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이 일치하지 않을 정도로 애매모호한 학문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신학의 어원으로 돌아가서 신학의 개념을 간단하게 규정할 필요를 느낀다.
어원적으로 신학은 두 가지를 우리에게 시사한다. 하나는 신학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학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을 다시 하나로 통합하면, 신학은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다. 현대의 신학은 성경 중심으로부터 너무 많이 이탈되는 경향이 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이 아닌 신이 신학의 세계 속에 너무 깊고 넓게 들어와 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부르짖었던 종교개혁자들처럼 성경적인 신학으로 돌아가야만, 수신을 도모하고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섬길 수 있을 것이다.
1.2. 신앙의 학문
신학(神學)은 신학(信學)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신학은 신앙에 관한 학문이라는 뜻이다. 신학이 관심을 두는 것은 신앙이다. 무엇을 믿느냐 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가진 믿음을 연구하는 학문이 신학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성령을 믿는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을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몸의 부활과 영생이 있음을 믿는다. 우리는 성경을 믿고 또 교회를 믿는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내용도 많다. 이런 내용들을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신학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은 신앙의 학문이다.
신학을 신앙의 학문이라고 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 그것은 신학은 신앙으로 하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믿음으로 하는 학문이다.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학문,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학문이 신학이다. 생물학을 생각해 보자. 생물학을 하는 데 있어서 꼭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하나님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곧잘 생물학을 한다. 신앙이 없어도 개를 연구할 수 있다. 개의 생김새나 특성을 관찰하고, 실험하고, 그리고 해부학적 접근을 통하여 얼마든지 연구할 수 있다. 인간의 지적 능력을 사용하여 무엇이나 연구하여 알아내고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알아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성의 영역을 초월한 영역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만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 주셔야만 된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계시라고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더라도 우리가 그 계시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인식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신앙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 이성만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신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밀리오리는 조직신학을 위한 자신의 저서의 제목을 『지식을 추구하는 신앙』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중세의 저명한 신학자인 안셀무스의 명제인 “fides quaerens intellectum”을 번역한 말이다. 안셀무스는 신앙은 지식을 추구한다고 하였는데, 곧 지성적인 신앙이 참된 신앙이라는 뜻을 함유하고 있다. 밀리오리는 여기서 신앙이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이 곧 신학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따라서 신학교에 가지 않더라도, 또 신학 책을 읽지 않더라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신학을 하게 되어 있다. 지식을 추구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신학을 하지 않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어쨌든 신학이라는 학문은 신앙의 학문이므로 신학교에서는 신입생을 모집할 때 신앙의 유무를 확인한다. 신앙이 없으면 신학을 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학생이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므로, 자격 없는 사람이 신학을 하는 것을 막을 길은 없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도 얼마든지 신학생이 될 수 있고 또 신학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혹자는 신학은 신앙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신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신학을 신앙의 학문이라는 속박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나 여기에 신학이라는 학문의 위험성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있어도 신학을 올바로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믿음 없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이론을 세우고 가르치고 한다면, 그런 신학이 어떻게 진정한 신학이라 할 수 있겠는가?
1.3. 실천적 학문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 신학을 학문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문자적으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신학이라는 말 자체가 ‘학’ 곧 학문이라는 개념을 이미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도는 신학이 너무나 학문적, 이론적이기만 해서 신앙 실천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져 버린 것에 대한 반성 내지 비판일 것이다. 과연 오늘날의 신학의 큰 문제점은 삶과 유리된 학문, 그저 이론적이기만 학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공부를 잘 한 사람이 반드시 훌륭한 신앙인인 것도 아니고 목회를 잘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을 곧잘 하게 된다. 신학은 잘 못해도 목회는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학과 목회는 이처럼 별개라는 생각이 많은 신학생과 목회자를 지배하고 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신학이 목표로 하는 것은 사변적 지식이 아니라 실천적 지식이다. 이론적이기만 한 지식이 아니라 생활과 사역에서 그 능력을 발휘하는 지식이다. 그른 신학은 신학교 교정에만 존재하는 신학이고, 참된 신학은 신학교 교정뿐만 아니라 교회와 가정, 그리고 삶의 모든 영역 어디에나 존재하는 신학이다.
종교개혁자 루터에게 있어서 신학의 방법은 명상(meditatio), 시련(tentatio), 그리고 기도(oratio)로 요약된다. 여기서 시련과 기도를 신학의 방법이라고 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루터에게 있어서 시련은 말씀의 실천에 따르는 고난이다. 말씀으로 인한 고난이 신학의 방법이요, 그 고난에서 해방되기 위한 기도가 또한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라고 하였으니, 루터에게 있어서 신학은 얼마나 실천적인 학문인가를 알 수 있다. 루터의 신학은 결코 탁상공론이 아니었다. 그는 머리로서가 아니라 몸으로 신학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루터를 이어 종교개혁신학을 완성한 사람으로 일컬으지는 칼뱅은 자신을 교회의 교사로 인식하였는데, 교회의 교사는 경건의 교리를 위함에 그 목적이 있다고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교리의 진위를 판단하는 기준은 경건이었다. 『기독교강요』1판(1936)의 ‘프란시스(Francis) 1세에게 드리는 헌사’에서 책을 저술한 의도를 “몇 가지 기초적인 원리를 기술하여 종교에 열심 있는 사람들이 참된 경건의 생활을 이루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그의 책이 “경건의 대전”(summa pietatis)으로 불려지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은 “경건의 신학”(theologia pietatis)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신지식(신학)과 경건(삶)이 분리할 수 없는 상호의존적 관계임을 역설한 것이다.
신학을 그저 이론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학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학문의 미로에 빠져버린 추상적이고 열매 맺지 못하는 신학은 참된 신학의 적이다. 칼 바르트는 신학에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선지자 아모스의 글을 빌어서 익살스럽게 표현한 적이 있다. “나는 너희의 강의와 세미나, 너희의 설교와 연설과 성서연구를 미워한다… 너희가 서로서로, 또 내 앞에서 너희의 해석학과 교의학, 윤리적이고 목회적인 지침들을 전개할 때 나는 그러한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나로부터 너희의 두툼한 책들과 논문들, 너희의 신학 잡지들을(그것이 월간이건 계간이건) 멀리하라.”
신학은 원래 이론적인 학문이 아니라 철저히 실천적인 학문이다. 오늘의 신학에 실천성이 배제 혹은 약화되어 있다는 비판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오늘의 신학이 올바른 길을 가지 못하고 있는 증거라 할 것이다. 참된 신학은 삶과 사역에 있어서의 실천성을 추호도 배제하지 않는다.
1.4. 겸손의 학문
흔히 신학을 하는 사람들의 성품에 대한 말이 많다. 아무개는 공부는 잘 하지만 인격에 문제가 있다는 등의 말이다. 내가 신학이라는 학문을 하면서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신학을 많이 한 사람들이 그렇게 훌륭하게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나의 일차적 결론은 그들이 바른 신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 교회사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는 목회자요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분의 명성을 들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질문했다는 것이다. ‘선생님, 많은 덕목 중에서 최고의 덕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아우구스티누스가 답했다. ‘겸손이니라.’ 대답이 너무 겸손하게 여겨졌던지라 사람들이 다시 물었다. ‘그럼 두 번째 덕은 무엇입니까?’ ‘그것도 겸손이니라.’ 서운한 맘을 감추지 못하고 사람들이 다시 여쭈었다. ‘그럼 세 번째 덕은 무엇입니까?’ 위대한 아우구스티누스가 무엇이라고 답변했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것도 겸손이니라.’ 덕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가 대답할 말은 하나 밖에 없었다. 겸손이 그것이다. 그에게는 겸손이 최고의 덕이었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원죄를 교만으로 이해했다. 창세기 3장에서 에덴동산의 행복을 누리고 살던 여자에게 뱀이 나타나 말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이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5)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이 유혹에 하와는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유일한 식물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고 말았던 것이다. 뱀으로 나타난 사탄은 여자에게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을 품게 하였던 것이다. 인간으로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이 교만의 뿌리이다. 이 교만이 모든 죄의 근원인 것을 파악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최고의 덕을 교만의 정반대인 겸손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 수 없다. 겸손한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을 아는 학문인 신학은 겸손한 마음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교만한 마음으로 획득한 신학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니다. 그렇게 얻는 교만한 지식은 자신의 신앙도 파괴하고 교회의 신앙도 파괴하고 말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하나님 지식의 세 가지 종류를 이야기하였다. 첫째는 통일적 지식(theologia unionis)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가장 높은 지식으로서, 신성과 인성의 통일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 인간성 안에서 소유하신 지식이다. 이 최고의 신학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신학일 뿐이다. 그보다 낮은 두 번째 종류는 관조적 지식(theologia visionis)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이 언젠가 하늘의 복된 상태에서 가지게 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리라 하였다(고전 13:12). 때가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 얼굴을 보면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 가운데 황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성도들이 죽어서 하나님나라에 갔을 때이다. 그러므로 이미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 있는 성도들은 이 땅에서 유명한 신학자들의 책을 읽으며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우리들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은 하나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 지식의 세 번째 형태로서 가장 낮은 단계는 탐구적 지식(theologia stadii)이라 한다. 이것은 이 땅 위에서 획득되는 하나님 지식으로서, 우리가 성경과 신학 책들과 신학자들의 강의를 통해서 알게 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다. 이것은 잠정적인 지식으로서 이 세상 살 동안만 유효하지 하늘나라에 가서는 별로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이 땅에서 우리가 공부하고 얻은 지식으로서의 신학은 거의 다 사라지고 더 이상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소위 신학이라는 학문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지식을 좀 얻었기로서니 그것을 가지고 자랑하거나 어깨에 힘을 주거나 할 것이 전혀 되지 못한다. 신학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어 줄 이유가 없으며, 오로지 겸손에 이르도록 도와줄 뿐이다. 신학공부는 오직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해야 할 일이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겸손해야 할 또 한 가지 이유는 신학자 스스로 하나님을 탐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자신을 계시해 주셔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그 말씀을 들음으로써 조금이나마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신학자는 신학의 대상인 하나님 위에 있지 않고 그 아래에 있다. 그러므로 신학을 하는 사람은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어떻게 하시는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관련하여 신학적 지식에 있어서 우리가 겸손해야 할 이유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하나님 지식은 반영적 지식(ectypal theology)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자기지식인 원형적 지식(archetypal theology)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게 된다. 즉 우리의 신학은 하나님 자신의 신학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리고 이 반영적 지식은 인간 편에서 행동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로 오는 행동의 결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싶다고 찾아감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자기를 알려주심으로서 이루어진다.
신학은 겸손하게 해야 할 이유는 또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 지식은 하나님 지식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절대적인 분이라 한다면 인간은 그저 상대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상대적 존재라는 것은 인간이 가지는 지식도 상대적일 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상대적인 인간이 이루어 놓은 어떤 신학을 절대화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 자신의 신학만 절대적일 뿐, 어떤 인간의 신학도 상대적이다.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고, 수정될 수 있고, 거부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을 하는 사람은 오로지 겸손한 마음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가르치려는 마음보다는 항상 배우는 마음이 필요하다.
1.5. 성경과 교회를 섬기는 학문
종교개혁의 신학으로 최고봉으로 인정받는 저술은 칼뱅의 『기독교강요』(Institues of the Christian Religion)일 것이다. 칼뱅은 그 책의 제 1판을 박해받는 개신교인들을 위한 변증의 목적으로 저술하였지만, 제 2판부터는 성경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곧 하나의 성경 안내서로 저술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칼뱅의 신학 개념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성경을 잘 이해하게 만드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흔히 성경과 신학의 관계에 대해 말할 때, 성경을 초등학문으로 신학은 고등학문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성경을 읽지만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면 성경을 뛰어넘어 신학 책만 읽어야 되는 줄로 착각한다. 성경은 수준이 낮고 신학은 수준이 높은 것으로 착각한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사고가 많은 신학교를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신학생들은 신학교에 진학하는 순간 이제는 성경은 손에서 놓고 어려운 신학 책들과 씨름해야만 되는 줄로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신학생들이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신학생들이 성경을 너무 모르니까 신학교에서는 성경종합시험이라는 제도를 두고 강제적으로 성경을 읽히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현상일 뿐만 아니라 신학이라는 학문의 좌표를 상실한 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성경보다 신학이 더 차원 높은 학문이라는 생각 자체가 허구일 뿐이다. 칼뱅에 의지해서 말한다면 신학은 성경 읽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학문이다. 신학을 공부할수록 성경을 더 잘 이해하게 되어야 한다. 신학은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한 학문이다. 신학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성경이 신학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이 성경을 위해 존재한다. 오늘의 신학은 성경에서 나왔지만 다시는 성경으로 돌아가지 않는 학문이 되어 버렸다. 자신의 뿌리를 잃어버리고 멀리멀리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교와 성경을 배우는 교회가 점점 더 멀어져 가게 된 것이다.
현대교회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교회에서 신앙심 깊고 열정적인 좋은 청년을 목회자로 만들기 위하여 신학교에 보냈더니, 갈수록 교회를 등한히 하고, 성경 읽기를 등한히 하고, 기도도 등한히 하고, 오로지 신학 책만 파고 있는데, 몇 년 지나고 나니 교회를 위해서는 별로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더라는 그런 슬픈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아무래도 이런 현상은 현대교회에 파고든 사탄의 술책이 먹혀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교회의 미래를 위해 장래가 촉망되는 우수한 청년들을 쓸모없는 교인으로 만드는 신통한 방법은 신학생이 되게 만드는 것이라는 술책 말이다. 사탄은 신학이라는 학문의 세계에서 나름대로의 확고한 권위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유능한 인재들을 신학이라는 학문의 세계에 가두어 놓고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신학이라는 학문이 학문의 세계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게 함으로써 많은 인재들을 그 속에 가두어 두는 것이다. 현대의 소위 주류 신학은 성경의 학문도 아니고 교회를 위한 학문도 아니다. 학문의 세계에서 다른 학문분야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경쟁할 수 있는 쟁쟁한 학문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거기서 유능한 인재들이 인정을 받고 보람을 느끼고 박수를 받고 그리하여 더욱 더 거기에 헌신하고 있다. 이것이 좋은 일일까? 학문적으로 인정받을지는 모르나, 교회의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온데간데없다. 신학의 학문적인 발전이 교회를 무력하게 만드는데 기여한다면, 과연 그런 신학이 하나님 앞에서도 설 수 있겠는가?
신학은 교회에서 나와서 교회를 섬기는 교회의 학문이다. 교회와 무관한 신학은 존재의 가치가 없다. 신학은 교회를 어떻게 섬기는가? 성경의 진리를 연구하여 교회에 제공하고, 교회가 성경의 진리를 따라 바로 설 수 있도록 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하는 학문이 바른 신학이다. 교회는 세상에 없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공동체인데,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복음을 찾아내어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주로 신학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신학이 자기 역할을 못하면 교회의 선포와 가르침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에서 멀어질 것이고, 그것은 교회의 존재목적에서 멀어지는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한 신학의 과제는 중차대하다. 교회의 목회는 신학과 더불어 이루어져야 한다. 신학이 결여된 목회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망각한 배처럼 위험하다. 신학은 교회가 신학적으로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파수꾼의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 곧 교회의 선포와 가르침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충실한지 살펴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므로 신학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 보아야 한다.
오늘날의 목회현장은 온갖 이단과 사이비 사상이 침투해 들어옴으로써 복음의 순수성이 무너지는 위기에 봉착해 있다. 교회의 목회자는 무엇보다도 순전한 복음 위에 분명하게 서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과 거짓에 대한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참된 복음과 가짜 복음이 무엇인지 가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대 교회의 상황은 그것을 어렵게 한다. 교회가 세상 속에 처해 있고,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들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세상문화를 호흡하고 있으므로, 세상의 가치관이 교회 속으로 물밀 듯이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세상의 정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나라의 진리가 왜곡될 가능성이 많다. 특히 교회의 양적인 성장에 목말라하는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의 규모를 키워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도입하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 그래서 현대의 교회 안에 점점 더 세상을 닮아가는 세속화 현상이 급속히 전개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신학은 교회를 위한 파수꾼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교회가 성경이 가르치는 순전한 하나님나라의 복음 위에 설 수 있도록 끊임없이 외치는 학문, 그것이 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