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회개하는 공동체(시51:17)

경회성 2011. 11. 10. 14:28

요즘 수요연경회에서 고린도전서를 공부하고 있는데, 고린도전서 3장에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사정없이 책망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여기에 신령한 자와 육신에 속한 자가 대조되어 나온다. 신령한 자는 원어의 문자적인 의미로는 영에 속한 사람이다. 흔히 영적인 사람이라고도 한다. 반면 육신에 속한 자의 원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육에 속한 사람이다.

 

너희가 신령한 사람이 아니라 육신적인 사람이라고 책망을 듣고 있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모두 예수 믿는 신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신자들도 바울에 의하면 두 종류로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령한 신자는 어른 신자이고 육신적인 신자는 어린아이 신자이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제발 좀 어른스러운 신자들, 신령한 신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주님은 오늘 우리들도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

 

영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흔히 두 가지 이야기를 한다. 하나는 그는 영력이 강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영력이 세다는 말이다. 또 하나는 영이 깨끗하다, 맑다, 순결하다는 말이다. 사람마다 육체의 힘이 다르듯이 영력도 다르다. 육체의 힘이 세어서 천하장사가 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영력이 커서 귀신도 쉽게 쫓아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육체도 단련하면 강해지듯이 영도 단련하면 강하게 된다. 주님은 우리가 강한 영의 소유자가 되어서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크게 쓰임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강한 영의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순결한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영이나 주회 같은 아이들의 깨끗한 피부도 있고, 문둥병자들의 불결한 피부가 있는 것처럼, 영에도 성령처럼 깨끗한 영이 있는 반면, 마귀나 악령, 귀신 같은 더럽고 불결한 영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그 영이 순결해지는 반면, 악령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영이 불결해지게 된다. 죄를 지으면 그 영이 불결해지고 회개하면 영이 깨끗해진다.

 

신령한 사람이란 먼저 그 영이 순결하고 그리고 영력이 센 사람이다. 영력은 있으나 영적으로 불결한 사람은 우리가 아주 조심해야 할 사람이다. 사탄은 영력은 세나 불결한 존재다. 영력은 강하나 그 영이 정제되지 못한 불결한 것일 경우, 하나님의 역사에 가장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세상에 있는 이단의 교주들이 말하자면 이런 사람들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한 영의 소유자가 되기를 원하기 이전에 순결한 영의 소유자가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순결해 지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할 때 영은 깨끗하고 순결해지고 부드러워지는 것이다.

 

회개가 중요하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 현실이다. 많은 말씀을 듣고 알지만 회개하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나라에 가기가 가장 어려운 사람이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말씀은 많이 알았지만 말씀으로 인하여 회개하지는 않았다. 성경에 의하면 귀신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이 없다. 귀신이 그렇게 성경을 많이 알아도 천사가 되지 못하고 귀신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회개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귀신의 가장 큰 특징이 회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만일 성경을 많이 알고 있으나 그 말씀에 따라 회개할 줄 모른다면 성령이 아니라 오히려 악한 영이 좋아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첫째 이유는 회개하기 위해서이다. 오늘 말씀 시편 51편의 배경이 되는 사건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다윗왕이 자기의 충성스러운 부하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보고는 한 눈에 반하여 그만 그녀를 범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일로 말미암아 밧세바는 다윗왕의 아기를 잉태하게 되었다. 다윗은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아를 불러서 그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추진했다. 그러나 우리아는 자기 동료들이 지금 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어놓고 싸우고 있는 판에 아내와 더불어 동침할 수는 없다 하고는 대궐을 수비하고 있는 군인들과 함께 잤다. 이러자 다윗은 자기의 범죄를 감추기 위하여 더 큰 죄를 도모하게 된다. 전쟁터의 총사령관인 요압장군에게 은밀히 명령하여 우리아로 하여금 적군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다윗의 충신 우리아는 전쟁터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러자 다윗은 남편이 죽은 밧세바를 데리고 와서 아내로 삼음으로서 모든 것을 합법화시켰다. 군인이 전쟁터에서 죽는 것도 정상적인 일이고, 남편이 죽었으면 그 아내가 다른 데로 시집가는 것도 정상적인 일이다. 거기에다가 남편이 전쟁에서 전사함으로써 불쌍한 처지에 빠진 한 여인을 왕이 구제해 주었다고 하여 오히려 항간에서는 다윗을 크게 칭찬하기까지 하였을 것이다. 다윗은 이렇게 모든 것을 표면상 정상적이며 훌륭한 것으로 만들어 놓고는 이제 됐다고 여겼다. 자기의 부끄러운 죄악이 탄로나지 않고 잘 덮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다 모르고 속아 넘어 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대단히 노하셨다. 그리하여 선지자 나단으로 하여금 이러한 일을 알게 하시고 그리고 그를 다윗에게 보내셨다. 나단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윗의 죄를 책망했다. 그 순간 다윗왕은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어서 크게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사무엘하 12:13은 다윗이 그때 회개하는 말을 한 것을 기록하였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일국의 전제군주가 아무 힘도 없는 선지자 앞에서 자기의 죄를 즉각적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깊이 통회하며 드디어 이 시편 51편을 상한 심령으로 써서 남겼다. 바로 이런 점이 다윗의 큰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를 위대한 성군이라고 일컫게 하는 대목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다윗은 왕의 권세를 마음껏 사용하여 죄를 지었다. 그때는 그것이 심각한 죄인 줄은 미처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일국의 왕이라면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자 그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엎드려 자복하며 통회하였다.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활동한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그 세례의 이름이 ‘회개의 세례’다. 자기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예수님이 오셔서 제일 먼저 전한 메시지가 바로 회개의 메시지였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복음을 믿으려면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개 안하면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8장에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두 사람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던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던 세리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 사람이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회개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였고, 그 의로움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기를 요구하였다. 자기는 회개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도 생각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기도하는데,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했다. 하나님을 뵐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자기 가슴만 치면서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의로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자기 죄만 생각났다. 그래서 가슴을 치며 회개할 뿐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하여 어떤 결론을 내렸는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하심을 얻었느니라.”

 

저는 오랫동안 대학생들을 위한 선교회에서 신앙생활하였다. 그리고 한 30년 전에 기성교회에 들어 왔는데, 교회에 와 보니 놀랄만한 일이 몇 가지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교인들이 지독히도 회개를 안한다는 사실이었다. 회개라는 말 자체가 교회에서는 거의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제가 활동하던 그 선교회에서는 회개하는 것이 일상생활이었다. 몇일 회개를 안하면 스스로 이상해져서 어색함을 느낄 정도였다. 옛날에 군대에 가면 졸병들은 날마다 구타를 당하는 것이 일이었다. 어쩌다가 구타 없이 잠자리에 들면 영 잠이 안 온다. 그처럼 회개를 안하면 이상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 선교회의 사람들은 노우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자기의 죄가 생각날 때마다 그것을 노우트에 기록해가면서 회개를 한다. 그들은 회개할 것이 생각났을 때 그것이 바로 은혜라고 믿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내가 회개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크게 한 번 은혜를 받으면 수십 페이지씩이나 되는 긴 회개문을 쓰기도 한다. 아마 경험하지 않은 분들은 상상이 안 될 것이다. 그 사람들은 성경 말씀 한 마디를 들으면 내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느라고 애를 쓴다. 자연스럽게 죄가 생각나게 되었을 때 비로소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회개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들은 말씀과 연관해서 그동안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었는지 자기의 어린시절에 이르기까지 과거를 샅샅이 뒤지면서 회개거리를 찾는 것이다. 주일예배 말씀을 듣고 회개거리가 생각나면 그 다음 주에는 감사헌금을 드렸다. 회개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말이다.

 

그런데 교회에 와 보니 대다수 교인들은 그들과는 정반대였다. 제가 대학청년부를 지도했는데,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거저 고리타분한 옛날 이야기로 읽고 있었다.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면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성경은 성경이고 나는 나다 이런 식이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그 말씀을 자기 삶에 적용할 생각은 안하고, 오늘 설교 재미있네, 목사님 준비 많이 하셨구먼, 이러고는 끝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마이동풍이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말씀을 들으면 회개를 한다는 것이다. 교인이라고 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가,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인가 하는 것은 단번에 알아 볼 수 있다. 그가 회개를 하는가, 안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회개하지 못한다. 불신자는 회개할 수가 없다. 스스로 죄인인 줄 아는 사람만이 회개를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제일 먼저 자기의 죄를 깊이 느끼게 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순간, 그만 엎드려 소리쳤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사도 바울이 아직 예수님을 몰랐을 때 그는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의식으로 가득찼다. 그래서 대제사장으로부터 영장을 받아서 예수믿는 사람들을 수색하여 잡아가는 일을 전문으로 하였다. 그러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달았다. 그는 그때의 그 충격을 평생동안 간직하며 살았다. 그의 인생 말년에 그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고백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세상에 수없는 죄인들이 있지만 자기만큼 큰 죄인은 다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믿음 안에서 성숙한 사람, 신령한 사람의 특징은 이렇게 자기 죄에 민감하여 회개하기를 잘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 우리의 내면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우리의 죽었던 영이 살아나는 것이다. 우리의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 곧 속사람을 성령께서 다시 살리시는 것이다. 이것을 중생이라고 한다. 거듭남. 거듭남으로서 비로소 우리는 새생명, 새 영을 가지게 되고,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거듭난 이 새 영은 깨끗하고 순결하다. 어린아이들의 뽀얀 피부처럼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생명이다. 그러나 이 순결한 영은 우리의 계속되는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더러워지게 된다. 영이 더러워지게 되면 영적인 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반듯하게 하려면 더러워진 영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이렇게 깨끗하게 씻는 방법이 바로 회개다. 우리가 회개하면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서 우리의 더러워진 영을 깨끗하게 씻어주시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영에 죄가 끼어 더러워져 있는데도 회개하지 않고 방치해 버리면 우리는 영적으로 점점 둔감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렇게 오래 지내다 보면, 이제는 영적으로 쓸모 없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버림을 당할 위기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현대 교회에는 회개를 게을리 하여 그 영이 마비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잘 점검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강력한 영의 소유자가 되지는 못할지언정 무감각한 영의 소유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영적 감각이 살아 있는 사람은 하루에도 몇 번씩 회개할 일이 생길 것이다. 양심에 가책이 올 때는 정식으로 회개해야 한다. 회개를 게을리함으로서 양심을 무감각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마음에 찔림이 있으면 곧 바로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지 않으면 말씀에 점점 더 둔감해지게 된다. 회개는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그 열매는 기쁨과 즐거움이다. 죄용서의 기쁨이 충만해지고 영이 맑고 순결해지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이런 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이다. 늘 회개할 태세가 되어 있는 사람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다. 교회는 회개하는 사람들이 모인 회개의 공동체다. 우리는 회개의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늘 생각하며, 회개를 생활화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늘 회개하는 사람, 그리하여 늘 새로워지는 사람, 날마다 영적으로 순결해지고 성숙해지는 사람이 되는 복이 우리 밀알 모든 식구들에게 임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