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마 27:50-66)

경회성 2010. 8. 11. 14:19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다시”는 46절 말씀과 연관된다. 거기에 제 9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셨다고 되어 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받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세상을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으셨다. 그 후 약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예수님은 다시 크게 소리를 지르신 것이다. 무엇이라 하셨는지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런데 누가복음 23:46에는,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시고 숨지시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하고 말씀하시고는 그대로 숨지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기도하셨음을 보여준다. 마지막 기도의 내용은 자신의 영혼을 위한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남은 모든 힘을 집중하여 큰 소리로 기도하시고 돌아가신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것저것 세상 일을 염려하지 않으셨다. 내가 죽으면 남은 사람들은 어찌 살랴 하는 그런 걱정도 하지 않고 오직 모든 힘을 집중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리고 인생을 끝내신 것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죽음 이후의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살아서는 이것 저것을 스스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죽은 후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모든 힘을 기울여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죽으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고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평소에 기도에 힘쓰다가 죽을 때는 영혼을 위하여 더욱더 집중하여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로마 가톨릭의 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에는 마지막 부분에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하는 대목이 있다. 잘 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지만 또한 잘 죽을 수 있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사는 날은 잠간이지만 죽음의 기간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이제 드디어 30여년의 짧은 인생을 마치고 예수께서 돌아가셨는데, 그때 무슨 일이 있어났는가? 51-53이 이것을 설명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를 보면 성전 마당이 있고 마당의 서쪽 편에 성막이 위치하고 있다. 성막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2/3는 성소라 하고 나머지 1/3을 지성소라 한다. 성소는 거룩한 장소, 지성소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라는 뜻이다. 성소에는 촛대와 떡상과 향단이 있고, 지성소에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언약궤와 그 위에 속죄소 및 두 그룹이 있다. 우리교회에 프로젝터를 구입하게 되면 성막 공부를 할 계획이 있다. 성막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 주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성막의 구조에서 성소와 지성소는 두꺼운 커튼으로 칸막이가 되어 있는데, 그 두꺼운 커튼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성소 휘장이다. 이것은 대단히 질겨서 사람의 힘으로는 찢을 수 없고, 코끼리 두 마리가 양쪽에서 잡아 당겨야만 찢어질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숨지실 때 이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다. 사람이 찢을 수 없는 힘으로 찢었고, 또 사람이 무슨 도구를 사용하여 찢으려면 아래에서 위로 찢어야 할 텐테,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찢으셨다는 것으로밖에는 해석이 안 되는 일이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 위하여 이 휘장에 대하여 좀더 알아보아야 하겠다. 이 휘장은 일년에 단 한 차례만 통과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것도 오직 대제사장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대제사장이 1년에 단 한 차례 즉 이스라엘 달력으로 7월 10일 곧 속죄일에 이 휘장을 들어 올리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는데, 들어갈 때는 반드시 속죄의 피를 가지고 들어간다. 자기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송아지의 피를 뿌리고 또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염소의 피를 뿌리는 그 일을 하기 위하여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 대제사장에게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으면 지성소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가는데, 그래서 특이한 것은 대제사장이 입는 예복이다. 그 예복에는 여러 개의 소리나는 방울이 달려 있다. 제가 어릴 때 우리집에 소를 키웠는데, 소의 목에 요롱이라는 방울을 달았었다. 소를 잃어버리면 그 요롱 소리를 듣고 쉽게 찾을 수 있게 한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대제사장의 예복에도 요롱같은 방울을 달아서 대제사장이 움직이면 방울소리가 들리게 되어 있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대제사장은 지성소에서 갑자기 진노로 말미암아 죽을 수 있는데 만약 거기서 죽으면 밖으로 끌어 낼 수가 없었다. 일년에 한 차례 외에는 거기에 사람이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몸을 밧줄로 묶고 그 밧줄 끝은 성소밖으로 늘어뜨리게 하였다. 그렇게 하여 사람들은 성소 밖에서 대제사장이 제사를 마치고 나오기를 침묵으로 기다려야 했다. 성소에 가까이 하거나 소리를 내거나 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대제사장이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의 의복에 달려 있는 여러 개의 방울은 대제사장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신호였다. 방울 소리가 들리면 대제사장이 아직 살아 있구나 하고 알게 될 것이고, 만약 오랫동안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이 죽임을 당했구나 하고 판단하게 되고, 그러면 사람들은 끈을 당겨서 대제사장을 지성소로부터 끌어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가 이처럼 거룩한 곳임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아야 하지만 함부로 가까이 했다가는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휘장은 인간의 죄로부터 하나님의 거룩성을 보호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그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지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이제는 활짝 열렸다는 뜻이다. 지성소는 인간의 죄 때문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고,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차례 들어갈 수 있는데, 이제는 누구든지 아무 때든지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예수께서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휘장은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시고 숨지시자 곧바로 거추장스러운 성소의 휘장을 둘로 찢어 버리신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오면 언제든지 지성소의 하나님을 만나뵐 수 있다는 선언인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잊어버리고 산다. 죄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진채 살기가 쉽다. 교회를 오래 다니면 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여긴다.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면 죄에 대해서는 졸업한 사람인양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교회생활을 오래 할수록 죄에 대해 더욱 더 민감해져야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다. 목사는 누구보다도 죄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야 한다. 장로는 그 다음으로 예민해야 하고, 안수집사는 그 다음으로, 권사는 또 그 다음으로 죄에 대한 의식이 민감해야만 정상적인 직분자요 정상적인 교회이다.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자. 그는 오랜 신앙생활 후에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다 되었을 때 자신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기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 하였다. 세상에 죄인들이 많이 있지만 가장 큰 죄인은 다름 아닌 바로 자기자신이라 고백한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지은 죄가 더 많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누구보다도 죄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이었음을 의미한다. 남들이 볼 때는 사소한 죄인데도 그는 워낙 죄에 민감한 사람이었으므로 그것을 크게 느낀 것이다. 작은 죄에도 민감하여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는 사람, 그가 진정한 신자인 것이다.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말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죄 없다고 하면 우리는 스스로 속이는 사람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 죄를 깨닫고 자기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하셨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알고 보면 죄다.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제대로 해결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것이 죄에 근거한다는 것을 알고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 옛날 구약시대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만사를 제껴두고 송아지나 양이나 염소나 하다못해 비둘기 같은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져와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다. 이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다른 제물은 필요가 없어졌다. 예수님이 영원한 화목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죄를 깨닫고 구체적으로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기자는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고,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둘로 찢어져도, 우리가 자기 죄를 깨닫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용서받지 못하고 죄 가운데 죽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회개하지 않는 바리새인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죄가 없는지 자기를 반성하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 스스로는 죄를 짓고도 죄인줄 모르고 지내기 일쑤다. 그러므로 제대로 용서받지 못하고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계속하여 고통과 저주와 실패와 질병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이 모든 저주와 실패, 질병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회개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왔다고 선언하셨고, 세례요한도 회개의 메시지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것이다.

현대교회의 큰 문제 중 하나는 죄에 대해 철저히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회개에 대한 설교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를 모르면 하나님의 은혜도 알지 못하고 진리도 알 수 없다. 우리는 무엇보다 죄에 대해 철저히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없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고속도로처럼 길이 뻥 뚤려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복이 우리에게 임할터인데, 죄가 그 길을 꽉 틀어막고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전달이 되며, 하나님의 복이 우리에게 임하며,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올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잘 살기를 원하시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고, 형통하기를 원하시고, 건강하기를 원하시지만, 그리하여 그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까지 하셨지만, 우리가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하고, 혹은 죄가 있어도 다른 사람보다는 작다고 말하면서, 회개하기를 꺼려하고 연기하고 있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전달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이 우리에게 도착하지 못하는 것이다. 죄가 그 길을 틀어막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회개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밖에 없다. 대구서 서울 가는 고속도로 상에 커다란 탱크로리 한 대가 빗길에 뒤집어져서 도로를 가로막고 떡하니 멈춰 서 있다면 이제 아무 차도 서울로 올라갈수 없게 된다. 교통은 막혀 버리는 것이다. 이 사고난 탱크로리 같은 것이 바로 우리 마음에 있는 죄이다. 이 죄가 우리 안에 있는 이상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교통은 일어날 수 없다.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해도 통로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아무리 우리에게 공급되어도 우리는 그것을 누릴 수 없다. 이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죄의 실상이다. 이 죄만 깨끗이 거두어지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고속도로가 재개되어 하나님의 은혜는 나의 것이 되고, 하나님의 복도 나의 것이 되고, 하나님의 능력도 나의 것이 되고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이 다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요한삼서 2절에서 이 하나님의 마음을 사도요한이 대언하였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잘 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사에 잘 되고 형통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이 건강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의 그 간절하신 소원이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팔이 짧아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다. 우리가 철저하게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죄에서 돌이키면 우리는 그 길로 용서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될 것이고, 기도하면 기도하는대로 응답을 받을 것이고, 우리의 영혼은 하늘나라에 거하게 될 것이고, 우리가 하는 사업이 형통할 것이고, 우리의 신체도 강건해질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계속 죄에 거하게 만드는 사탄과 그 수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더 이상 속지 말아야 한다. 큰 죄만 죄인 것이 아니라 작은 죄도 죄이다. 사소한 죄에서도 돌아섬으로써 사탄의 모든 궤계를 물리치고 어두움의 악한 영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쫓아내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은혜와 그 빛과 진리와 능력 안에서 항상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55절이하에는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 여자들은 순전한 제자들의 모범으로 나타난다. 칼빈 선생은 이들을 가리켜, 예수님의 입술에서 구원의 진리를 듣는 것 한 가지 때문에 돈과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자기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는 약 100km로서 그 당시로서는 매우 먼 거리였다. 주로 걸어서 여행을 하여야 했으므로 적어도 사흘은 꼬빡 걸리는 길이다. 요즘 미국까지 하루면 충분히 간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게 얼마나 먼 거리였는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여인들은 순전히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 모든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단 한 가지 구원의 진리였다.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진리,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그 한 가지 때문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섬겼던 것이다. 오늘날의 그 어떤 목회자 못지않은 훌륭한 사역자라 아니할 수 없는 그런 여인들이었다.

오늘날은 진리의 말씀 때문이 아니라 이익을 위하여 신앙생활하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현대 교인들의 뚜렷한 한 특징은 작은 교회를 기피하고 큰 교회를 선호하는 것이다. 그들이 큰 교회를 선호하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도 있겠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큰 교회가 세상을 사는데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큰 교회에 다니면 많은 유력한 사람들을 만나 교제하는 이익이 있고, 적당히 눈에 띄지 않게 교회다니는 이익도 있고, 각종 문화행사들을 많이 즐길 수 있는 이익도 있고, 유명한 강사들의 세미나 등을 통하여 교양을 늘릴 이익도 있고, 시설이 좋아서 마음과 몸이 편하게 다닐 수 있다는 이익도 있고 등등 이루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이익들이 있다. 그래서 큰 교회는 점점 더 크게 되고 작은 교회는 점점 더 작아지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현대교회의 현저한 특징이다. 이것은 참 바람직스럽지 못한 현상이다. 세상적이고 육신적이고 문화적인 이익이 많기 때문에 큰 교회를 선호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스럽지 못한 현상이다.

예수님의 제자단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 많은 제자들이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따랐는데, 어느 날부터 제자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예수께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병든 자를 치료하고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을 나타내시자 수많은 사람들이 덕을 좀 보려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은 세상적인 능력보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시며, 영원한 생명의 진리를 전파하시는 데 열중하셨다. 그러자 그런 데에 관심이 없는 세상적인 사람들이 급속하게 빠져나갔던 것이다. 상당히 실망하신 예수께서 12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이 이것이다. “너희도 가려느냐?” 너희도 나를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이때 수제자인 베드로가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는데 우리가 어디로 가겠나이까?” 베드로와 소수의 제자들은 이익을 추구하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진리를 추구하는 하나님나라의 사람들이었다. 예수께 합당한 사람은 결국 이런 사람들이다. 본문의 여인들,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익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 때문에 자기들의 돈도 희생하고 수고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이유는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데 있어서 유일한 장애물인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제거되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부르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힌 장애물인 죄는 용서되고 우리는 하나님과 소통하게 되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열매를 맺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하나님의 복이 우리의 것이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강하게 하며, 하나님의 치료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 것이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고 우리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느냐 그렇게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르치고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진리 곧 영원한 생명의 진리이다.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른 여인들은 이 진리를 사모하고 이 진리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돈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오늘 우리들도 이 갈릴리 여인들의 순전한 정신을 본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를 사랑하고 실천하기에 힘씀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