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한국교회와 한국신학을 위한 제언(김중은 특강 중 발췌)

경회성 2010. 4. 2. 09:40

* 김중은, "21세기 한국 장로교회의 진로와 신학노선에 대한 인식과 전망" (2005년 6월 17일, 명성수양관, 신대원 1학년 연합수련회 특강에서 발췌, 김중은은 당시 장신대 총장)
 


IV. 21세기 한국 교회와 한국 신학을 위한 제언

    21세기 한국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세계 교회와 신학계가 주목하는 대상이 되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역사신학교수인 맥그래쓰(Alister E. McGrath)는 2002년에 출판한 “기독교의 미래”(The Future of Christianity)라는 그의 책에서, 지난 20세기 서양의 기독교는 쇠락한 길을 재촉한 반면, 한국은 주목할 만한 교회의 성장을 계속해 왔음을 지적하였다. 그래서 중국 본토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기독교의 성장과 함께 한국 교회의 경우는 이제 세계 기독교의 미래의 진로를 결정할 하나의 주목할 만한 현상이라고 지적하였다.
한편 그동안 서양의 교회와 신학은 서로 점점 더 간격이 멀어져서, 영국의 경우 학문적 신학과 교회의 신앙은 1970년대에 단절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맥그래쓰는 기술하였다. 학문으로서 신학과 교회의 신앙의 단절과 괴리현상은 비단 영국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20세기를 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양 교회의 쇠퇴의 원인들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소위 “학문적 신학”의 해독으로서, 영국의 경우 맥그래쓰에 의하면 무신론자로서 종교다원주의자인 죤 힉(John Hick)이 편집한 1977년판 「성육한 하나님의 신화」라는 책이 그 출발점이라고 보고 있다. 옥스퍼드, 캠브리지 대학교를 중심한 현대 영국의 학문적 신학은 성경을 일종의 “신화”로 해석하면서, 교회의 삶, 예배, 선교와는 상관없는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신학으로서의 적절성을 상실했다고 맥그래쓰는 진단한다. 또한 학문이라는 이름 아래 현대 신학이 온갖 상대적 가정들과 개인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어서, 한마디로 현대 영국의 학문적 신학은 “지성의 천박함과 영적인 부적절함”을 나타내고 있다고 맥그래쓰는 지적하였다. 이러한 서양 교회의 신학적 경험은 현대 영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한국에 기독교를 전해 준 미국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호주 장로교와 나아가 개혁교회 전통의 중심지인 독일의 루터교나 스위스 개혁교회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와 신학도 이미 벌써 영국과 서양 교회가 경험한 교회의 쇠락과 학문적 신학의 “낯선 느낌”을 으스스하게 경험할 날이 우리 문전에 닥아 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성경의 진리, 기독교의 진리는 본래 복잡하거나 골치 아프고 난해한 것이 아닐 것이다(고후2:17; 4:2 등).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진리에 관한 설명은 본래 단순하며(마11:25), 빈부귀천, 유무식,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접근이 용이하고 알아듣기 쉽게 전달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가 곧 진리로 인도하는 길이요, “진리”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것이어야 함을 말씀한 것이다. 교회의 신앙을 파괴하고, 신학생들의 신앙양심을 의심으로 혼잡하게 하는 어떤 학문적 이론이나 학설도 성경의 진리와는 상관없는 일종의 속임수(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속이는)일 뿐이다(고후2:17; 4:2 등 참조).
    오늘 세계 교회와 신학계가 21세기 한국의 기독교를 주목하는 시점에서, 우리의 교회와 한국의 신학은 서양 교회와 신학의 실상을 철저히 분석하고 연구하여 그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선 다음의 몇 가지 제안을 드리면서 끝을 맺고자 한다.
    1. 우리의 신앙과 신학은 성경에 기초한 성경 중심적이어야 한다. 철학적 원리에 근거한 목회와 신학과 기독교교육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지금 신학교 신대원 과정 3년 동안 성경 66권 중 몇 권이나 그 본문을 강해하고 성경을 가르치는지 염려스러운 현실이다. 신학교에서 정작 성경은 공부하지 않고, 성경에 “관한” 책들과 학설들을 잡다하게 소개하다 보니 부실한 신학교육이 된다고 생각한다. 1931년 평장신의 교과과정을 보면 신구약 강해 과목이 전체 과목의 43,4%를 나타내고 있다. 현재 장신대 교과과정에서 성경 본문 강해 과목은 손꼽을 정도로 줄어들었고, 성서학 과목의 비중도 전체 과목의 20%대 수준에 머물고 있다.
    2. 21세기 한국교회의 목회와 신학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분명한 성경관을 정립해야 한다. 목회에서 설교의 메시지와 신학의 모든 지식은 세상 학문이나 철학적 상상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만 얻을 수 있다. 성경의 권위는 물론 자증하는 것이지만, 교회와 신학은 성경의 권위에(계시+영감) 도전하는 여러 운동들과 학문적 이론들(예컨대, 무신론, 이신론, 불가지론 등)에 응전해야 한다. 열린 신학이나 닫힌 신학도 다 생명력이 없다. 우리의 신학은 “자유하는” 신학이어야 한다. 그것은 바른 성경관에 기초하여, 부단한 “개폐신학(開閉神學)”을 해야 한다. 이를테면 여러 신학적 입장들에 대해서 “비평적 종합”을 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서정운은
“그러므로 어떤 신학이나 주장에 몰입하거나 비판 없이 삼키는 철부지가 아니라 어른답게 모든 신학사조와 주의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분석, 종합하고 소화해서 흡수하는 신학방법이 옳다”고 하면서, “그것이 비판적 종합이라고 보며, 우리가 견지해야할 통전적(통합적) 신학의 방법과 자세”라고 하였다.   
    3. 기독교 신자들(또한 놀라울 정도로 다수의 목회자들)이 학문적 신학 서적이나 전문적인 신학논문들을 멀리하고 읽지 않는 현실은 오늘날 동서양이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와 신학이 손에 손을 맞잡고 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우리 신학자들이 어떤 책을 쓰고 어떤 강의와 주장을 펴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현재 교회와 신학이 만나는 통로가 사실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고(장로회신학대학교의 경우 “교회와 신학”이란 잡지를 통해 노력하고 있으나 미흡한 형편이다), 신학교 교육과정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 거쳐 가야할 한갓 제도적 장치에 불과한 느낌을 주고 있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교회에 가서는 말하지 말라는 교수들도 생겨나고 있다. 총회신학교육부는 목회현장과 신학현장의 가교를 놓아주는 작업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4. 우리 장로회 통합교단의 표준 성경 주석과 성경사전이 출판되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과 신학을 건축하기위한 이러한 기초가 마련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장이 펼쳐질 수 있다. 우리 장로회신학대학교와 본 교단 총회의 전통에서 볼 때, 일제치하의 열악한 상황 아래서도 1936년에 장로교신학교교사회에서 성경사전(비록 번역 편집된 것이지만)을 출판하였고, 1937년에는 총회교육부와 평장신 교수회가 협력하여 총회 신구약 표준주석을 출간하기 시작하여 구약 6권(욥, 시편; 이사야; 잠언, 전도, 아가; 창세기; 민수기; 레위기), 신약 5권(로마, 고린도전, 고린도후, 갈라디아; 요한복음, 마가복음; 히브리서, 야고보서; 누가복음)이 나왔는데, 1950년대 6.25 전쟁과 장로교회의 분열로 중단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5. 성경은 신앙의 책인 동시에 역사와 진실을 기록한 책이다. 성경적 신앙과 사실 역사는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교회의 신앙과 학문적 신학의 상관관계는 두개의 서로 다른 초점을 가진 타원형이 아니라, 하나의 초점을 중심한 동심원의 구조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성경해석학에서 역사적 이스라엘과 신앙적 이스라엘,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해석문제도 타원형이 아닌, 동심원의 구조에서 만나야 한다. 윤철호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는 직접적으로 동일시되거나 양자 중 어느 하나로 환원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이 양자의 지평융합을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물론 일리가 있으며 신학적으로는 신정통주의 입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윤철호는 곧 바로 “…우리에게 역사실증적인 의미에서 역사적 예수는 없다.”고 단정함으로써 타원형적 해석학의 문제점과 위험성을 노출하고 있다. 동심원적 해석학에서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가 언제나 어느 하나로 환원될 필요가 없으면서도 역사적 예수의 실재를 그 초점에서 함께 붙들고 있으며, 결코 역사 실증적인 예수는 “없다”(또는 “모른다”)라고 주장하는 지적 허무주의와 불가지론으로 도피하지 않게 된다. 역사실증적인 예수의 실재가 부정되면, 신앙의 그리스도도 부정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신앙의 그리스도란 인간의 종교적 상상력의 산물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
    6. 성경의 진리는 보편적이다. 진리는 인종, 계급, 신분, 성의 장벽을 뛰어 넘어서 언제나 진리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는 삼위일체 신학이다.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의 신이 유일신으로서 동일하다는 종교다원주의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기독교 진리의 보편성은 에큐메니칼 신학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적 신학의 명분을 내세워 편협한 민족주의 신학을 운위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한국적 신학정립을 아직도 기독교 토착화 주장으로 몰고 가는 것은 그러므로 편협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건 기독교는 이미 한국에 토착화 되었다. 토착화된 기독교의 잘잘못은 계속 우리의 신학적 논의 주제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1885년 4월 5일 미국 개신교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한국인은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은 넌센스다. 왜냐하면, 첫째로 구원은 하나님의 고유 주권이며(“하나님은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신다”, 롬3:29), 둘째로, 율법을 가지지 않는 이방사람이 본성과 양심에 따라 율법이 명하는 바를 행하면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율법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의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같은 유비가 성립될 것이기 때문이다(로마서 2:14-16 참조). 구원 문제와 관련하여 요즈음 만인구원론 또는 만유구원론을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으나, 이러한 학설들은 성경에 기초한 바른 구원론이라고 보기 어렵다.
    한숭홍은, “우리는 19세기에 들어온 기독교 신앙을 100년 동안이나 무조건 전통보수(傳統保守)해 왔다. 그러나 한 세기를 뛰어넘은 21세기에는 한국교회 자체가 ‘한국 신학’이라는 고유 브랜드(brand)의 신학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우리의 고유한 신학을 ‘신토불이(神土不二) 신학’이라고 부른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여기서 문제는 19세기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또 그 신앙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인지 전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무분별한 수입신학의 난맥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말은 옳지만, 한숭홍 자신은 “19세기에 들어온 기독교 신앙”을 지금도 “무조건” 전통보수 하고 있다는 말인가? “신토불이 신학”란 또 무슨 의미인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한숭홍은 계속해서, “한국의 독창적 신학, 그것은 그리스도를 한국화 하는 과정으로부터 출발해야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신학적 오해이며 논리의 모순이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심으로 이미 한국화 하셨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적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마누엘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서 “그리스도를 한국화”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을 그리스도화” 해야 하는 신학적 과제를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