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llas Willard, 하나님의 모략
Dallas Willard. The Divine Conspiracy. 윤종석 옮김. <하나님의 모략> (서울: 복있는 사람2007).
하나님은 이 메시지를 성경의 본질 규명에 대한 이론에서 자기들조차 합의점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이 시대 소수의 전공학자들이나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인류에게 주시지는 않았으며 그럴 마음도 없으시다고 나는 믿는다. 성경이란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를 통해 세상에 주신 선물이지 학자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 성경의 취지는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22)
이웃사랑이 첫째 계명이 아니라 둘째 계명이며,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하셨다. (65)
하나님의 능동적 통치에 사로잡힐 때, 우리의 행위는 그분의 영원한 역사의 한 요소가 된다. (66)
사랑이 이긴다. 이것이 현대 기독교 좌익의 복음이다. (101)
하나님과 공간의 관계는 인간과 몸의 관계와 같다. (135)
사랑이란 언제나 상대에게 알려지기를 원하는 법이다. (135)
영혼이란 에너지의 한 형태다. 영혼은 일하며, 일하는 모든 것은 힘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관점에서 영혼은 다른 모든 힘의 기반이 되는 궁극적 형태의 힘이다. (140)
마음 즉 의지란, 곧 인간의 영혼이다. 이 인간 영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당신과 우리의 관계의 기초로 받아들이실 우리 안의 유일한 영역이다. 그것은 우리의 본질적 존재의 영적 측면이요,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의 장소다. 그 안에서만 우리의 삶 전체는 영원한 것이 될 수 있다. (143)
예수의 말씀을 비현실적이거나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논리가 뛰어나다기 보다는 상상력이 짧은 것이다. (148)
사실, 몸이 죽는 순간 우리는 다른 차원의 의식을 얻어 전에 몰랐던 경험의 부요를 누리게 된다. 미국의 전도자 무디는 인생 말년에 이렇게 말했다. “머잖아 어느 날 내가 죽었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오. 믿지 마시오. 그때 나는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 생생히 살아 있게 될 것이오.” 두 명의 호송병이 본회퍼를 교수대로 데려가려고 오자 그는 옆에 있던 친구에게 짤막하게 말했다. “이제 끝이네. 하지만 나한테는 이게 삶의 시작이라네.”(151-2)
예수에 대한 우리의 헌신의 기반은 오직 하나. 그분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우주에 대해 진실을 알고 계시는 분이라는 인식에만 있을 수 있다. (161)
예수께서 현실의 모든 영역 - 육체적, 도덕적, 영적- 을 지식과 실제 면에서 완전히 통달하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분이 주님인 것은 그분이 과연 명장(明匠)이시기 때문이다. (164)
예수 시대의 유명한 스승들의 목표가 정보를 전달하는 데 있지 않고 듣는 이들의 삶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키는 데 있었다. (187)
다른 사람들에게 인간 실존의 구체적 현실 속에 임재하는 하나님나라를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듣는 자들의 머리만이 아니라 가슴과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들은 그것을 붙들기 위해 굳이 필기를 할 필요가 없다. (190)
믿음과 순종의 결합이야말로 21세기에 들어서는 교회의 중대과제다. (227)
플라톤의 <국가론>은 영어로 Republic 으로 번역되었는데, The City 즉 <도시>로 옮기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 책은 사실 인간의 영혼에 대한, 즉 인간이 의를 행하며 행복하게 살려면 영혼이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다. 그 요구되는 상태를 이 책은 정확히 ‘디카이오수네’(dikaiosune, 義)라 표현하고 있다. ... ‘디카이오수네’를 원뜻을 최대한 살려 옮기려면 ‘한 사람을 진정 옳거나 선한 존재가 되게 해 주는 그 무엇’이라고 풀어쓸 수밖에 없다. 간단히 진정한 내면의 선이라 말할 수 있다. ... 윤리 이해의 중심 용어를 찾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스승 플라톤이 사용한 ‘디카이오수네’ 대신 흔히 ‘덕’(virtue)으로 번역되는 ‘아레테’(arete)라는 말을 사용했다. ... 구약 잠언은 사실 ‘디카이오수네’ 보다 ‘아레테’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아레테’는 빌립보서 4:8, 베드로후서 1:3-5 등 신약에도 등장한다. 그럼에도 히브리 전통과 신약전통에서 더 높이 취급되는 단어는 ‘디카이오수네’다 그것은 아마도 ‘아레테’가 주로 인간 자체의 능력과 성취를 강조하는 반면, ‘디카이오수네’에는 영혼과 하나님의 관계를 중시하는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 70인역에서 ‘쩨다오카오’(tsedawkaw)와 ‘쩨데크’(tsehdek)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디카이오수네’라는 말로 옮겨졌고, 이 말은 흔히 영어로 ‘의’(roghteousness)로 번역된다. ... 결과적으로 고대 세계의 도덕 이해에 대한 최고의 양대 전통이 ‘디카이오수네’란 말 안에서 일치점을 찾는다. ... 사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의 구속사역은 하나님 자신의 ‘디카이오수네’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롬 1-8장). (233-5)
분노는 처음에는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적극적으로 분노를 받아들여 고의로 그 속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대개 그렇게 한다. 아예 분노형 인간이 될 수도 있다. 분노의 격류가 언제나 준비돼 있어 조그만 일 하나로도 즉각 터져 나오는 것이다. (239) ... 분노를 쉽게 털어내지 못하고 그 속에 빠져들 때, 거기에는 언제나 자기 의와 허영심의 요소가 끼어 있다. 분노를 품고 사는 사람을 찾아 보라. 거기 상한 자아의 주인공이 숨어 있다. ... 분노가 식어지지 않게 하려면 자신이 부당 대우를 받고 있다거나 용납 못할 불의를 색출하는 일에 가담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내게 그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240) ... 미국에서만 해마다 25,000 건의 살인이 발생한다. 그중 1,000 건은 직장에서 일어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동료 직원의 폭력에 죽어가고 있다.(241) ... 오늘날 영향력을 쥔 자들은, 우리는 반드시 분노해야 하며, 사회악에 항거하려면 분노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부추기고 있다. (242)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고, 어느 경우에도 선하지 않은 것이 멸시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하게 되고”. (243) ... 모든 사람이 멸시의 공포 속에 살아가고 있다. (244)
현대인의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간음을 행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친밀함이란 인간 영혼의 굶주림이며 우리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 사람들은 언젠가는 친밀함이 한 방울이라도 스며나올 것이라 기대하며 섹스라는 단추를 계속 누르고 있다. 헛수고일 뿐이다. 친밀함이란 하나님나라 안에 있는 배타적 정절의 틀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261)
배우자 간의 분노와 멸시는 둘 사이의 성적 기쁨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그 중요한 필요가 채워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공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불만에 찬 배우자는 자기 삶 속에서 부딪치는 실존 인물을 어떤 식으로든 성적 공상 속에서 특정 역할에 억지로 끼워 맞춘다. (261)
근원을 변화시키지 않고 행동만 통제하려든 바리새인들의 전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265)
분노와 멸시와 강박적 성욕 탐닉이 사라진다면 이혼 발생 건수가 얼마나 될까? 물론 전무에 가까울 것이다. 아예 이혼 이야기가 나올 일조차 없을 것이다. (273)
인간의 역사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여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복된 자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295)
인간의 인정과 칭찬을 바라며 그것을 목표로 선행을 한다면 하나님은 정중하게도 옆으로 비켜서신다. (299)
정죄 자체가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다. 남을 정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마음에 그분이 말씀하신 천국의 의가 없다는 증거라는 것을 그분은 아신다. (348)
기독교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기초로 세워지기 때문에 정신적(단순히 인간적) 실체가 아니라 영적 실체다. 그 점에서 기독교공동체는 다른 모든 공동체들과 절대적으로 다르다.... 우리의 모든 교제의 기초와 힘과 약속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깨달을수록 그 교제를 생각하고 기도하고 소망하는 우리의 마음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본회퍼) (365-6)
인간의 사랑은 자신을 위해 상대에게 향하지만 영적 사랑은 그리스도를 위해 상대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랑은 상대와의 직접적 접촉을 구한다. ... 반면, 천국의 사랑 안에서는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들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신다. ... 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그리스도가 서 계시기 때문에 나는 감히 그들과의 직접적 관계를 꿈꾸지 않는다. ... 이것은 곧 나의 사랑으로 상대를 규제하고 지배하고 강요하려는 모든 시도에서 상대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본회퍼) (366-7)
인간이란 언제나 신념대로 살게 되어 있다. 그 외에는 가능하지 않다. 그것이 신념의 본질이다. ... 언젠가 어느 목사가 자기가 그토록 열심히 준비한 저녁 예배에 교인들이 나오지 않을 때 너무나 속이 상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도 목사였기 때문에 그 심정 이해가 간다. 그러나 단순히, 주일 저녁에 집에 머물려고 하는 교인들의 신념에 초점을 두었더라면 결실이 더욱 좋았을 것이다. (468)
뭔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임을 잊지 말라. 2 더하기 2가 4라고 믿는다는 것은 곧 집안에 돈이나 사과가 얼마나 있는지 알고자 할 때 그 공식에 준하여 행동한다는 뜻이다. (483)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을 간절히 생각할 때 태어나는 것이다. (490)
신학자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신학자는 큰 위험에,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다. 신학자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며 그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500)
그녀는 사후의 삶에 대해 자녀들과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나중에 그런 세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질 때 자녀들이 실망할 것이 싫어서라고 한다. ... 사후의 삶이 없다면 분명 실망할 수조차 없다. 반면, 사후의 삶이 있다면, 그 자녀들은 거기에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실망이란 존재가 지속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581)
하나님의 우주에서 물질은 궁극적으로 마음이나 영혼의 지배를 받는다. 예수와 그분의 사람들의 전통에서 그것은 하나의 기정사실이다. (5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