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작은 일에 충성하자 (눅19:11-27)
1. 비유의 배경 설명:
1) 하나님나라가 그렇게 빨리 오는 것이 아님.
2) 비유의 줄거리 설명
봉독된 말씀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신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제 예수께서 로마의 군대와 헤롯 정권을 몰아내시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곧 나타나리라 기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비유를 들려주심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빨리 오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셔야 했던 것.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비유이면서 오늘 다시 읽은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믿고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2. 사람: 일하는 존재
1) 13, 장사하라
2) 15, 어떻게 장사하였는지 알고자 하였다.
3) 17,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오늘의 비유는 어떤 귀인이 자기 종들 열을 불러서 장사하라고 지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먼 곳에 갔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돌아와서는 그 종들이 장사를 잘 하였는지 알아보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는 장사를 잘 한 종들에게는 크게 보상하고 장사를 안 한 종에게는 큰 벌을 내리는 내용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사한다는 것은 일을 가리킵니다. 귀인은 종들에게 일을 맡긴 것입니다. 그리고 종들이 그 일을 잘 하였는지 알아보고자 하였다. 일을 잘 한 종들과 일을 잘 못한 종을 구별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귀인 또는 주인이 바로 우리 주님을 가리키고, 종들은 주님을 믿는 우리 신자들, 나아가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주님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먼저, 주님은 우리 인간이 일하는 존재이고 일을 해야 하는 존재임을 가르쳐 주셨음. 귀인은 종들에게 은화 한 므나 씩을 나누어 주었다. 한 므나는 20데나리온에 해당하는 로마의 화폐였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었으므로 20 데나리온은 한 달 월급에 해당한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에는 적은 액수였습니다. 그것이 작은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그러나 주인은 그 적은 돈을 나누어 주면서 이것을 밑천으로 삼아 장사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으로부터 작은 직분이라도 받아서 일을 시작하라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성경이 한결같이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일하는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일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존재의 목적에 어긋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열심히 일을 하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인간의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으므로 이 창조의 목적에 어긋나는 삶을 살면서 행복해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3. 사람: 일하고 많은 이윤을 남겨야 할 존재
그런데 인간은 그저 일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효과적으로 해야 되는 존재. 많은 이윤을 남기도록 해야 됨.
1) 15, 어떻게 장사하였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2) 16-17,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 주인이 말했다.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3) 18-19, 다섯 므나 남긴 종에게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게 했다.
4) 20-24, 본전치기만 한 종에게는, 책망하였다. 특히, 23절,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니라” 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게 하였다. 주인은 자기의 돈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 더 보태 주었다.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주인이 이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인은 먼 여행에서 돌아와 회계할 때, 이윤을 많이 남긴 사람에게는 칭찬과 상을 주고 이윤을 남기지 못한 종에게는 책망과 벌을 주었습니다. 또 이윤을 남긴 종들 가운데도 많이 남긴 종과 적게 남긴 종을 차별하여 상을 주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므나를 맡긴 것은 이윤을 많이 남기기를 기대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일하고 이윤을 많이 남겨야 할 존재로 보심이 분명하다. 주님은 우리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그리고 많은 열매를 맺어서 주님께 바치기를 원하신다. 장사를 하지 않은 종은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만약 주님을 위하여 일하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하면 책망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4. 은혜: 모두 종에게 주는 주인
1) 24, 25,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그런데 24, 25절을 읽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한다. 24, 주인은 악한 종에게서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고 지시한다. 이게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주인이 열므나 남긴 종으로부터 그 원금과 이윤을 환수하지 않았다는 것. 25도 같은 것을 말합니다.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습니다.”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주인이 은혜로운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주인은 종들이 남긴 열매를 고스란히 종들의 몫이 되게 하였습니다. 종이 주인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열 므나를 남겼는데, 그 열 므나를 주인이 거두어 가지 않았다. 귀인은 종들이 벌어들인 이윤을 하나도 거두어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모두 종들의 소유로 돌렸을 뿐만 아니라, 원금까지도 그 종들의 소유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종들에게, 장사하여 이윤을 남기라고 명한 것은 귀인 자신의 재산을 불리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종들의 살림을 풍성하게 해 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하고 열매를 맺으라고 하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슨 부족한 것이 있어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고 우리로부터 무언가를 받아 가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태도는 오직 은혜다.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명령도 하시고 요구도 하십니다. 우리가 듣기에 싫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명령, 주님의 말씀은 알고 보면 다 은혜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은혜에 풍성하시고, 우리가 언제나 잘 되기를 원하시는 좋은 분이신 것입니다.
5. 충성 테스트
1) 17, 19. 귀인의 보상: 열 고을, 다섯 고을.
2) 귀인의 보상의 이유: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다.”
귀인은 이윤을 종들의 것이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한 것에 비교할 수 없는 상까지 얹어 주었습니다. 열 배의 이윤을 남긴 종에게 귀인은 말했습니다.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다섯 배의 이윤을 남긴 종에게도 귀인은 상을 주었습니다.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열 므나와 열 고을은 비교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열 므나라 해보았자 아무리 잘 쳐줘도 노동자의 열 달 치 봉급 밖에 안 됩니다. 그에 비해 열 고을을 다스린다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대구시장 자리에 해당합니다. 한 므나로 장사한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이 큰 상을 선사한 것입니다. 귀인이 왜 이렇게 하였을까요?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귀인은 애당초 종들이 남기는 이윤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귀인은 왕으로 내정된 사람이었고 마침내 왕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일국의 왕에게 열 므나 다섯 므나의 이윤이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그 작은 이윤을 벌어들이겠다고 종들에게 일을 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귀인의 진짜 목적은 종들의 사람됨을 테스트하는 것이었습니다.
귀인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일은 왕위를 받아 오면 누구를 어느 자리에 앉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인사입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재적소에 사람을 쓰는 것이 왕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귀인은 자기 종들 가운데서 누가 좋은 일꾼인지 그 속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됨됨이를 시험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한 므나씩 나누어 준 것은 바로 일꾼들의 사람됨을 테스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귀인은 상을 주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작은 것 정도가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큰 일에 충성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큰 일을 맡으면 누구나 팔을 걷어부치고 일을 시작합니다.주인이 나를 믿어주는구나 하고는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칭찬할 일이 못됩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작은 일을 맡기면 사람들은 대개 시큰둥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자존심 상한다고 그 일을 거부합니다. 주인이 나를 이 정도로밖에는 안 봐주나 하고는 안색이 변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맡아 하더라도 그저 대충대충 하고 맙니다. 그러나 바로 이 상황에서 작은 일도 큰일처럼 열심을 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아무도 쳐다 봐 주지 않더라도 주인을 위해서 숨어서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다. 이러므로 사람을 쓰려면 먼저 작은 일을 맡겨서 테스트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갓 입교한 자를 중직에 맡기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다가 어려움을 겪는 일들이 많다. 어떤 사람을 믿고 시험도 해 보지 않고 큰 일을 덥석 맡겼다가 낭패를 당하는 일들 말이다. 성경의 교훈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오늘 말씀에서 귀인은 지극히 작은 일이라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한 므나씩 나누어 주면서 그것이 지극히 작은 것임을 귀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귀인은 이 지극히 작은 것을 맡기면서 이 종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는 것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작은 일도 아니고 지극히 작은 일을 맡아서 거기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러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
안에서 새는 쪽박은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디가나 그 사람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하는 사람이 큰 일에는 충성할 것이라고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귀인의 지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한 므나라는 작은 일을 맡긴 것입니다. 그 사람이 충성스러운 사람이라면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충성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대충대충하고 말 것입니다. 귀인은 바로 이런 진리를 알았던 것입니다. 이윤을 얼마나 내었느냐?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 그 액수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충성스러운 마음을 가졌느냐, 이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은 사람의 인물됨을 알아보는데 가장 좋습니다. 그 사람이 큰 사람이라면 작은 일도 크게 여기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지극히 큰 사람이라면 지극히 작은 일에도 큰 일에서처럼 충성할 것입니다.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잡는 데에도 전력을 다한다고 하였습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된 사람이고 큰 인물입니다. 남들이 알아주는 소위 큰 일에만 눈독을 들이고 알아주지 않는 작은 일은 경홀히 하는 사람은 작은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큰 일을 맡기면 안됩니다. 큰 일만을 맡고 싶어하는 사람은 사실은 작은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6. 충성은 믿음으로 인내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데 걸린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하는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귀인은 먼 나라로 가서 왕위를 받아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먼 나라라는 말은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암시합니다. 그 동안에 한 종은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므나를 남겼습니다. 산술적으로 말하면 이 사람은 자산에 비해 열배 곧 1000%의 이윤을 남긴 것입니다. 1000% 의 이윤을 남기려면 몇 년이 걸리겠습니까? 이 사람이 특별히 장사에 재능이 있다고 하여도 열 배의 순익을 얻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년은 걸리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종은 오랜 기간을 인내하며 장사를 했다는 말이 된다. 몇 일 또는 몇 달 반짝 열심을 낸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여기에 보면 귀인이 왕위를 받기 위하여 간 사이에 백성들 중에 사자를 뒤로 보내어 왕위를 받지 못하도록 공작하는 세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귀인에게는 반대세력이 있었고, 그들로 말미암아 왕이 되지 못하고 정권을 잃어버리고 영원히 귀국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 귀인을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들은 반대세력에 의하여 다 쫓겨날 것이고 어쩌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인을 위하여 충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 정도의 충성심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귀인을 믿고 귀인이 반드시 승리하여 돌아오리라는 것을 믿고 인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한 므나를 거저 수건으로 싸두었던 사람은 귀인에 대한 그러한 믿음이 없었던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정권이 최종적으로 누구에게 돌아갈지 모르므로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비겁한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귀인을 위하여도 일하지 않고 그 반대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그냥 눈치만 살피며 아무 일도 안 했던 것입니다. 반대편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입게 될 화를 피하려고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인에게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이고 비겁한 사람이고 악한 사람입니다. 22절에서 주인은 그를 “악한 종”이라고 불렀다. 그를 악하다고 한 데에는 단순히 이윤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가 종이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중립을 지키며 눈치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문제는 이윤을 남기지 못했다는 그 자체가 아니라 자기 주인에 대해 충성스러운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악한 것이며, 그러므로 마땅히 심판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충성한다는 것은 주님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주님이 승리하면 나도 승리하고 주님이 죽으시면 나도 죽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죽으시더라도 나는 따라 죽을 수 없다고 하면서 뒤로 살 길을 찾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충성스러운 사람이라면 주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살 수 없습니다. 주님께 모든 운명을 걸고 주님과 함께 승리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충성이기 때문입니다.
7. 빈익빈 부익부
1) 24-26,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그들이 대답,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습니다. 주인 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빈익빈, 부익부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경제학 용어로서 가난한 자는 점점 더 가난하게 되고, 부한 자는 점점 더 부하게 된다는 사회경제적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소위 양극화 현상이라 불리는 것으로 사회적으로 좋지 못한 현상이므로 정치하는 사람들은 적절한 정책을 사용하여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회적으로는 정책에 의하여 이런 현상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막을 수 없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빈익빈 부익부라는 약극화 현상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데 있어서, ‘은혜 위에 은혜’라는 공식으로 얻는다.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더욱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고, 경배하고, 섬기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욱 더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은혜의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반면,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고, 그래서 예배 드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더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은혜의 악순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가진 자는 더 받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이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지금 있는 것을 긍정하여 하나님께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그러면 점점 더 받게 되는 은혜의 선순환을 타게 될 것이다. 우리 밀알교회 성도들은 은혜의 악순환이 아니라 선순환 가운데 살고 있으시기를 바란다.
오늘 말씀은 특별히 재림을 염두에 두고 하신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책망 받은 종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귀인과 같이 하늘나라로부터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데는 예상외로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히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려내는 좋은 시금석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충성심이 없는 사람 곧 믿음이 없는 사람은 예수님의 재림도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200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예수께서 오시지 않았으니 재림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재림하실 주님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 이들은 심판 받은 종과 같은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당장 오시면 열심히 일하겠지만, 언제 오실지도 모르고 또 영영 오시지 않을 것 같으니 일하지 않겠다, 대신에 내가 좋아하는 일, 나를 즐겁게 만드는 일만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심판 받은 종과 같은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받고 큰 상을 받을 착하고 충성된 사람은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과 우리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임을 굳게 믿고 인내하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다.
주님은 주님을 위해 일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일한 량에 비할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좋은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주님에게는 많은 일자리가 있습니다. 큰 자리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주님의 고민은 그 자리를 맡을 적당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장 큰 관심은 열 고을, 다섯 고을을 맡아서 다스릴 사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꾼을 찾기 위해 지금도 열심히 테스트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작은 일, 지극히 작은 일을 맡기시고는 그 일을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주님께 충성스러운 일꾼인지,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믿고 사모하며 인내하면서 그 말씀을 지키는지를 시험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주님께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인정이 되면 당장에라도 우리를 들어서 큰 일을 맡기실 것입니다. 요셉은 오랫동안 종으로, 죄수로써 지냈지만 그 기간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실함이 증명되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감옥에 있던 그를 일거에 세계 최강대국 애굽의 총리로 들어 쓰셨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충성스러운 일꾼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우리 한마음교회 성도들은 모두 열 므나를 남긴 종과 같은 그런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며 섬기면 누가 그것을 보고 알아주겠는가? 목사나 전도사는 잘 모를 수 있다. 교회의 다른 식구들도 잘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은밀한 곳에서 보고 알고 계신다. 주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으로부터, 잘 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큰 것을 네게 맡기겠다는 음성을 듣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