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경회성 2008. 3. 27. 10:02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 따위 말을 하는 자체가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불경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입으로는 부활을 말하면서도 행위는 그렇지 않은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을 날마다 목격하는 것이 현실이다. 예수의 재림을 믿지 않는 사람이 그들이고, 죽은 후 심판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들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거짓말을 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사람들, 진실 보다는 인간관계를 더 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진리보다 정치에 더 민감한 사람들이 사실은 다 부활을 믿지 않고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부활을 믿는다면 부활하신 주님의 재림을 믿을 것이고, 살아계신 주님의 심판대에 설 것을 믿을 것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이고, 거짓말을 하지 못할 것이고, 인간관계나 정치적 이해보다 진실과 진리를 더 찾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는데, 오늘날 예수님의 부활을 참으로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하는 슬픈 마음으로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을 생각해본다.


성경은 예수의 부활을 크게 두 가지로 증언한다. 하나는 빈 무덤 또 하나는 부활현현이다. 전자는 예수님의 무덤에 시신이 없으니 부활하셨다는 것이고, 후자는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친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으니 부활의 증거가 아니냐는 것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부활의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데 있다. 불신적인 학자들은 그것들을 부활의 증거로서 믿지 않을 이론을 많이 개발하여 가르치고 있다. 마태복음에도 있듯이, 제자들이 시체를 몰래 다른 곳으로 옮긴 후 부활하셨다고 거짓말을 유포했다든지,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너무나 갈망한 나머지 마침내 부활하셨다는 착각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말이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대적할만한 사상을 만들어낼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진실을 거짓말로 조작하고 거짓말도 사실로 조작할 수 있다. 부활을 믿지 않으려고 작정한 바에야 무얼 못하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까지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부활 증인들의 순교적 삶 앞에서는 명쾌한 핑계를 대기 힘들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제자들은 낙심하고 두려워하여 숨어 살게 되었다. 그러한 그들이 얼마 후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부활을 외치는 십자가의 전사가 되었다. 그들은 입으로만 부활을 외친 것이 아니라 몸으로, 순교적 삶으로 부활을 증언했다. 야고보는 사도 중 제일 먼저 헤롯에 의해 순교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어달려 죽었다. 부활을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던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요한은 장수하였지만 평생 동안 복음을 위하여 핍박 받는 순교적 삶을 살았다. 부활을 증언하다 도끼로 목이 잘려 순교했다는 바울은 이렇게 자기의 삶을 서술했다. “나는 수고를 넘치도록 하였다. 옥에 갇히기도 누구보다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 유대인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여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였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고후 11:23-27)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종교적 열심에 불탄 나머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던 그가 어떻게 이렇게 목숨을 내놓고 부활을 증언할 수 있었겠는가?


부활 증인들의 이러한 순교적 삶은 이들이 전한 말보다도 더 확실하게 부활을 증언하고 있다. 그 비밀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은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한 놀라운 사실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무슨 경험이 그들로 하여금 낙심과 두려움과 의심을 극복하게 만들었을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경험한 것 외에는 달리 설명되지 않는 일이다. 죽음 앞에 두려워 떨던 그들이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은 죽음에 대한 승리인 부활을 경험한 것 외에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부활을 전하다가 순교한 제자들은 부활의 의미를 깊이 탐구한 신학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순히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실을 목격했고 그래서 그것이 사실이라고 전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실제로 경험한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걸 수 있었다. 만일 그들에게 예수님이 진짜 부활하셨는지에 대한 의심이 있었다면, 그들은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참으로 어리석고 한심한 사람들이 되고 만다.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한 사람도 아니고 무수한 제자들이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겠는가? 게다가 당시의 기독교는 공인되지 않은 이단이었고, 그런 증언을 하면 자기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엄청난 불이익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실도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우길 수 있겠는가? 누가 사실이 아닌 것을 위하여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칠 수 있겠는가? 누가 아무런 이익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랑하는 가족의 고통과 비참한 죽음이 초래되는 상황에서, 목숨을 바쳐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였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 그렇다면 그것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죽음보다도 더 고귀한 진리 - 바로 그들이 스스로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 외에 그 무엇으로 그들의 삶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나는 부활의 역사성에 대해 믿을만한 근거를 이야기했지만, 믿음은 논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영이 사람들의 마음에 불신과 의심을 심어주면 어쩔 도리가 없다. 오직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긍휼히 여기사 믿게 하시고 구원하시기를 기도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 말로서는 부활을 고백하여도 행실로는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진실보다 인간관계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진리보다 정치를 앞세우는 사람들, 최후의 심판을 유치한 신화라고 조롱하는 사람들, 주의 재림을 지나간 드라마로 생각하는 사람들, 교회 안에 있으나 세상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계시록에서 말한 바, “비겁한 자들과 불신자들과 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다. (계 21:8)   --- 최태영 교수 ---

 

(2008년 3월 영신학보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