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소설 <침묵>이 기독교 고전이 될 수 있는가?

경회성 2007. 1. 21. 20:53
 최근 우리 교단 교회 및 신학계 일부에서 일본인 작가 엔도 슈사꾸의 소설 <침묵>을 기독교 고전으로 평가하고 추천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의아한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이 소설은 순교를 눈 앞에 둔 인간의 배도의 심리를 대단히 잘 묘사함으로써 문학적인 면에서는 상당한 칭찬을 받을 수 있겠지만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는 과연 얼마만큼 덕이 될 수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번역자는 후기에서 이 소설을 ‘격조 높은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느니라.” 소설에 의하면 이것은 주인공 로드리꼬 신부가 깊은 고뇌 끝에 들은, 오랫동안 침묵하고 계시던 그리스도의 음성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신부는 열렬한 하나님의 사랑과 존재를 깨닫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역자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고 썼다. 이 정도라면 기독교의 고전으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작가의 원래 의도가 무엇인지 애매한 면이 있지만, 번역자나 또 이것을 기독교고전으로 추천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이 소설은 특정한 상황에서의 배교를 정당화하고 있다. 소설이 말하는 핵심적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들은 성화를 밟고 침을 뱉음으로서 객관적으로는 배교를 했다. 배교의 이유는 다음의 세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고문받고 있는 다른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살아야만 주님과 사회를 위해서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셋째는 주님께서 성화를 밟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이유는 단순한 휴머니즘의 차원 이상으로 볼 수 없다. 휴머니즘은 평소에는 좋은 것이지만 결정적인 때에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우리 개혁교회의 정신과 양립할 수 없는 사상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두 번째 이유 곧 배교가 주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순교를 하고 싶었지만 주님께서 배교하기를 원하셨다고 보고, 따라서 그들의 배교는 순교보다도 더 값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순교자가 되어 신앙의 영웅으로 인정을 받고 싶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오히려 교회로부터 배교자라고 비난받는 길을 택했지만, 주님으로부터는 인정을 받을 것이라고 자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주인공 신부들의 배교를 순교보다도 더 숭고한 행위로 미화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인공으로 하여금 성화를 밟음으로서 자신에게 배교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 신앙의 세계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성경에서 예수님은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배교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니,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문학적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다. 굳이 설명을 더한다면 그것은 배교자들이 마음 속으로 듣고 싶어했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발람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자기의 원하는대로 듣고 싶어서 다시 기도한 것과 마찬가지다.


소설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들은 주님의 침묵을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만일 소설의 내용대로 주님께서 침묵하셨다면, 그 침묵을 나는 이렇게 해석하겠다. 주님은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셨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성경에 이미 다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때를 위해서 주님은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예를 들면, 십자가의 길을 가시겠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책망하면서, 그러면 안된다고 항변하였다. 그때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신부들은 순교할 수 있는 복된 상황에서 도리어 인간의 일을 생각하며 주님의 다른 대답을 기다렸으니,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더 하시겠는가? 신부들도 순교하고 감옥에 갇힌 평신도들도 다 순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신부들이 망쳐 버렸고, 그 결과 일본 기독교는 망해버렸다고 말하고자 한 것이 작가의 원래 의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나는 주인공들이 참으로 해서는 안되는 배교를 했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배교를 절대로 미화시켜서는 안된다고 본다. 그들의 배교는 소설에서처럼 이노우에라는 기독교박멸론자의 각본대로 된 것에 불과하였다. 작가의 뛰어난 문학적 상상력에 대해서는 아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본받아야 할 순교적 신앙을 교묘하게 파괴하고 있는 이런 책을 기독교고전으로 추천할 수는 없지 않을까?


소설 침묵의 논리는 성서적 신앙의 기본을 흔들어 놓는 매우 해로운 사상이다. 사도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하였다고 하여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을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며, 배교자들도 다 인간적인 고충이 있었음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나, 그렇다고 배교를 미화시켜 주어서야 되겠는가? 이것은 역대의 무수한 배교자들과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당시의 한국 교회의 논리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순교보다 더 귀한 배교라는 이러한 사상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무슨 덕을 세우며 무슨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이것은 로마제국을 정복한 초대교회의 순교적 신앙과 우리나라 초대교회를 일군 순교자들의 피를 경멸하는 결과에 이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소설 <침묵>은 평신도들이 보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기독교고전이 될 수 없다. 이 책은 배교를 합리화시켜주고 순교적 영성을 약화시키는, 신앙에 있어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모호한 책이므로 교회로서는 금서로 지정하는 것이 차라리 마땅한 일이지, 고전이라니 당치 않다. 다만 신학생들로 하여금 성도의 신앙을 노략질하고 있는 현대 사탄의 계략을 이해하고 또 신앙적 사고를 훈련시키는데 있어서 약간의 도움은 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2002.3.18)

 

(* 이 요지를 더 발전시켜 "순교와 배교의 논리"라는 제목으로 2003년에 논문을 썼다. 소설 <침묵>과 손양원 목사의 순교론을 비교했었다. <신학과 목회>(2003) 참조. 2007.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