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E. McGrath, <천국의 소망>
Alister E. McGrath. A Brief History of Heaven. 2002. 윤철호, 김정형 역. 천국의 소망. 크리스챤헤럴드, 2005.
서문: “이 책의 초점은 서양의 문학작품들이 천국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여 왔으며, 또한 이러한 이해가 서양인들의 삶과 사고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 살펴보는데 있다.”
1. “하나님을 본다는 것과 천국을 본다는 것은 같은 말이다.”(12)
(*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이므로, 천국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경험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위의 표현이 가능하다.)
2. “사실상 우주와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결정하는 것은 개념이 아니라 주로 이미지이다.”(13)
(* 개념은 언어로 구성되는데 비해 이미지는 그림으로 구성된다. 전자는 추상적이지만 후자는 구체적이고 시각적이다. 현대인의 특징은 개념 보다 이미지에 더 가치를 둔다는 것이다.)
3. ‘정교회는 성상의 역할을 강조하였는데, 그것이 바르게 이해되고 사용될 때, “천국에 이르는 창”으로서 기능한다고 보았다. 일련의 강력한 이미지들이 천국에 대한 사람들의 사고와 상상력을 통제하고 자극하였는데, 그 중 도성의 이미지와 동산의 이미지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13)
(* 성상(icon)의 가치를 이해하게 한다. 새예루살렘성과 에덴동산은 하나님나라의 이미지로 기능한다는 것.)
4. 아우구스티누스와 바닷가 소년. ‘소년은 모래를 파서 만들어 둔 구멍에다 손으로 바닷물을 움켜서 부어넣고 있었다. 아이가 동일한 동작을 계속하는 것을 본 아우구스티누스는 물었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저는 지금 미리 파서 만들어둔 모래 구멍에다 바다를 옮기고 있어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소년의 어리석은 행동을 중지시키려고 말했다. “어떻게 이 많은 양의 물을 이 작은 구멍에다 옮겨 담을 수 있겠나?” “아우구스티누스 선생님, 선생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무궁한 신비를 단지 인간의 말로 기록된 책에 다 담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세요?” 당시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을 저술하고 있었단다.’(14-15)
무한한 하나님을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눈높이를 맞추어 우리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셔서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친근한 이미지들은 하나님의 본성과 의지를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16)
5. 이성과 상상력: ‘낭만주의에 따르면, 이성은 인간이 이 세상의 현실에 견고하게 닻을 내릴 수 있게 하는 반면, 상상력은 인간이 물질적인 질서의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서 초월적이고 영적인 진리를 분별할 수 있게 해 준다. “이성이 진리를 인식하는 타고난 능력이라면, 상상력은 의미를 인식하는 능력이다.”(C. S. 루이스)(17-18)
6. 유비(analogy): “미지의 세계는 이미 알려진 세계와 비교를 통해서 어렴풋이 알려진다. 이것이 바로 유비의 본래적인 의미다.”(19)
7. 지상의 도성, 천상의 도성:
“한때 지상의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을 중심으로 했던 이스라엘의 소망은 이제 천상의 도성으로 초점을 옮기게 되었다.”(25) “신약성경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천상의 예루살렘에 관한 환상이다.”(26)
“세 예루살렘 도성 안에는 성전이 없다.”(계 21:22)..... “도성은 그 자체로 성전이 된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은 성전의 재건을 염원했지만, 계시록은 성전이 더 이상 불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29) ...“하나님의 현존이 현실 속에 실현된 이상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성전은 더 이상 불필요하게 된다.”(30)
“존 번연은 ‘멸망의 도성’에서부터 ‘천상의 도성’에 이르는 여정을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진 모호함과 슬픔, 고통을 이해하기 위한 틀로 확립하는데 성공했으며, 이점에 있어 그는 이전의 모든 사상가들을 능가한다.”(59) (* 존 번연, 1626-88, <천로역정>)
8. 천상의 몸의 형태
“매우 창조적인 신학자로서 플라톤주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던 오리겐은 부활의 몸은 순수하게 영적이라고 주장했다.”(63)
“미국의 유명한 복음주의자 빌리 그래함은 연합신문의 한 사설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화장과 관련하여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염려하는 것은 몸이 완전히 소멸된다는 생각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고를 바르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몸은 화장을 하든 매장을 하든 마찬가지로 완전히 소멸된다. 우리 선조들의 무덤은 오늘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이 묻혔던 흙은 이미 오래 전에 다른 곳으로 흩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이나 무덤에 어떠한 일이 생기든 그것은 부활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 현재 우리의 몸은 잠시잠간 우리가 거하는 천막이다. 한편 부활의 몸은 우리의 영원한 집이 될 것이다. 그 두 몸은 겉으로 보기에 비슷해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화장은 부활에 있어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68-9)
9. 낙원, 에덴 동산
이레네우스(130-200)는, 에덴에서 생명나무는 죽음의 나무가 되었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의 나무(십자가)는 생명나무가 되었다고 했다.(88)
암브로시우스에 따르면, “아담은 이성의 미덕을 표현하고, 이브는 쾌락을 추구하다가 쉽게 길을 잃어버리는 인간의 감각을 표현한다. 여기에 더하여 암브로시우스는 뱀을 쾌락으로 해석한다. ‘뱀은 쾌락을 표상한다. 그리고 여자는 마음의 감정 혹은 감각을 표상한다. 감각이 기만을 당하면 지성 또한 오류에 빠지게 된다.’”(92)
(* 지성, 감성, 그리고 쾌락의 관계를 통찰하였다. 일리가 있다. 단, 지성을 남자, 감성은 여자에 대입시킨 것은 지나치다)
10. 천년왕국에 대한 터툴리안의 견해
“이 왕국이 지속되는 천년 동안 성도들은 그들의 공로에 따라 순차적으로 부활한다. 성도들이 모두 부활하고 나면, 세상은 소멸되고 심판이 집행된다. 우리는 순식간에 썩지 않는 옷을 입고 천사와 같은 존재로 변화되고 곧이어 천상의 왕국으로 옮겨진다.”(95)
(* 여기서 눈에 띄는 부분은 성도들이 공로에 따라 순차적으로 부활한다는 것이다. 나는 성도들이 죽을 때 부활하는 사람도 있고, 잠자다가 마지막 날에 부활하는 사람도 있고, 그 믿음의 정도에 따라 시기가 달라질 것이라고 최근 논문에서 말하였는데, 터툴리안의 이 견해가 하나의 전거가 되겠다.)
11. 아퀴나스: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창조질서를 관장하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고백하는 것이다.(100) (* 하늘을 초월로 이해하는 원조가 아퀴나스였다)
단테는 <신곡>(commedia)에서 낙원을 묘사하는 가운데 ‘tras'라는 접두사가 붙은 일련의 동사들을 사용한다. 이것은 천국을 묘사함에 있어 통상적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야 함을 역설한다. 우리가 천상의 낙원의 영광스러움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정도를 넘어서고(trasmodare),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며(trasumanar), 한계 위로 비상해야(trasvolare) 한다.(111-112) (* 천국은 초월성을 가리킨다)
12. 이레네우스: 울타리로 둘러싸인 동산(hortus conclusus). 2세기에 울타리로 둘러싸인 동산은 기독교교회에 대한 상징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이레네우스는 ‘교회는 세상 속에 심겨진 동산이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교회가 에덴에서 잃어버렸던 가치들을 세상 가운데 다시 회복시켜주는 통로라는 전제 위에서 교회의 삶에 대한 복잡한 설명을 전개하였다.(113)
13. 위에서 내려오는 새예루살렘과 성육신교리의 유사성.
계시록의 천국이해가 기독교의 성육신교리와 명백한 병행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육신 교리 또한 하나님께서 내려와 인간 역사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셨음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제한된 능력을 발휘하여 이 역사의 영역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 천국에 도달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위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비전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을 아주 효과적으로 그것도 시각적으로 확증하고 있다.(130)
14. 속죄: atonement= at one ment. 하나가 된 상태. 화해된 상태. (틴데일이 신약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다가 화해, reconciliation 개념을 독자에게 전달하는데 어려움을 느낀 후 대용으로 사용. 131)
15. 동방교회는 십자가를 전쟁터로 이해함. 그곳에서 선과 악이 격돌하여 선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믿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시고 만유의 주(pantokrator)로 등극. (136)
16. 켄터베리의 안셀름(11세기): 하나님이 성육신 하신 이유는, 하나님이자 인간으로서 그리스도는 배상금을 지불해야 할 인간의 의무를 짐과 아울러 구속에 필요한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159)
신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값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다.(162)
17. 천국에 이르는 통로로서의 교회
3세기 키프리안의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은 중세시대에,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그리스도는 천국의 소망을 가능하게 만들었을 뿐, 그 소망을 현실로 가져오는 것은 오직 교회가 하는 일이다. 이에 따라 교회는 구속을 분배하는 데 있어 독점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171)
18. 속죄의 사유화: 천국에 이르는 통로로서의 개인의 신앙
경건주의의 시발점은 필립 야콥 슈페너의 <경건한 열망, pia desideria, 1675)>의 출판으로 잡는다. 니콜라우스 루트비히 폰 진젠도르프(1700-60)는 일반적으로 헤른후터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경건주의 공동체를 창설한 인물. 그는 당시의 무미건조한 합리주의와 무능한 정통주의 대신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친밀하고 개인적인 관계에 기초한 ‘마음의 종교’를 주창하였다. 이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초점은 이성이나 정통교리가 아니라 ‘감정’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살아 있는 신앙’이란 표현을 썼는데, 이는 개신교정통주의에서 말하는 신조에 대한 맹목적인 동의와 구별된다. 진젠도르프의 이러한 사상은 영국으로 건너가 존 웨슬리(1703-91) 형제를 통해 더욱 발전된다. 그는 동시대의 이신론자들의 둔감한 이성과는 달리 기독교 신앙의 경험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찰스 웨슬리는 작사한 찬송가에서 천국의 소망을 보증하는 것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영혼 안에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개인의 자유로운 결단이라고 하였다. 경건주의 전통은 영혼 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하고 느끼는 것을 강조하였다.(178-181)
19. 인간의 경험 안에 있는 천국의 두 이정표: 염원과 자연.(187)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하여 수많은 신학자들이 염원(longing)이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의식에 주목하고 이것을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기억과 천구에서 회복될 낙원에 대한 예기로 해석하였다. 캔터베리의 안셀름이 지적했듯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이미 그들을 영원한 지복으로 인도하실 목적을 가지고 계셨으며, 그래서 그들이 본능적으로 이 최종적인 목표를 갈망하도록 만드셨다.(188)
20. 천국의 예기로서의 자연
존 던에 따르면, 자연과 기독교성경은 한 저자가 기록한 두 권의 책이다. 하지만 전자는 반드시 후자의 빛 안에서 읽혀져야 한다.(193)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은 그 창조자의 더욱 위대한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싶은 간절한 소원을 불러일으킨다.(194) 그에 따르면 자연은 역설적이게도 스스로 충족시킬 수 없는 갈망을 우리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며,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천국을 찾도록 만든다.(195)
21. 사랑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해
근본적으로 플라톤의 사랑 이해를 기독교 전통에 따라 재구성한 것.
인간의 사랑은 초월적인 질서에 대한 이정표 혹은 표지로서 기능한다. 즉 사랑은 인간에게 현재의 질서 속에서 지성을 통해 스스로를 초월할 것을 요구하며, 천상에 있는 하나님의 도성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될 세계를 미리 맛보라고 초청한다.(200-201)
(* 인간의 사랑은 천상의 영원한 사랑에 대한 이정표 또는 표지이다.)
22. 낭만주의
낭만주의는 부분적으로 인간 본성과 세계 일반에 대한 기계론적인 이해에 대한 반작용으로부터 태동하였다.(207)
워즈워스는 자연세계 안에 궁극적으로 자연을 넘어서 존재하는 실재를 향한 염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주제를 전개한다.(210)
23. C.S. 루이스
1898에 북아일랜드에서 태어남.
자유주의적 기독교를 물을 섞은 기독교라 부르며 공개적으로 비판. (221)
1980년 봄 타임지는 루이스를 20세기에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하나님의 변증가였다고 평가.(221)
24. 하나님과 만남으로서의 천국
아우구스티누스는 천국의 특징을 육체적 사랑을 뜻하는 큐피디타스(cupiditas)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영적인 사랑을 뜻하는 카리타스(caritas)로 특징지워진다고 하였다. (237)
25. 환상으로서의 천국: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프로이드
포이에르바하(1804-72)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과 불멸에 대한 염원이 천국 개념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244)
마르크스는 이러한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영생을 향한 인간의 염원은 사회경제적 소외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반 종교 비판의 기초는 종교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종교를 만든다는 것이다. 종교란 아직까지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혹은 다시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의 자의식이며 자부심이다.” 그에 의하면 종교의 궁극적인 기원은 인간이 그들의 적절한 실존양태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다. 종교적인 믿음을 없애기 위해서는 그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해야 하며, 이것은 세계 경제체계의 근본적인 변혁을 요구한다.(244-5)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투쟁은 종교가 그 영적인 향기를 머금고 있는 세계에 대한 투쟁과 간접적으로 결부되어 있다.”(246)
프로이드에 따르면 천국이나 하나님과 같은 관념들은 일종의 소원성취로서 충족되지 못한 인간의 갈망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프로이드의 강경한 무신론은 종교적 관념의 기원에 관한 그의 분석에 근거하고 있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선행하고 있다. (248)
일부의 사상가들은 포이에르바하식의 종교비판, 특히 천국비판을 받아들여야 하는 추가적인 이유로서, 천국의 소망이 민족들 간에 분쟁을 야기시켰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천국에 대한 믿음을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더 평화롭고 안정적인 세계에 살 수 있다. 존 레넌(1940-80)은 그의 노래 ‘상상하라’에서 그의 청중들에게 갈등도 없고, 천국도 지옥도 없는 이상적인 세계를 마음속에 그려보라고 권유하였다. ... 그는 종교적인 신념을 평화의 적으로 규정하였다.(249)
26. 위로문학: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 들어간다는 생각에서 위로를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사랑하는 연인과 다시 결합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위로를 얻는다.(258)
27. 영성(spirituality)
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곧 어떤 사람에게 생명과 생기를 가져주는 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영성이란 신앙의 삶, 곧 신앙을 불러일으키고, 신앙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신앙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유익을 주는 것과 관계된다. ... 영성이란 실제적인 신앙생활에서의 실천, 곧 어떤 사람이 자신이 믿고 있는 바에 따라 행동에 옮긴 것과 관계된다.(271)
28. 천국의 공동체성
신약성경의 천국비유들은 공동체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 영생은 단순히 개인적인 인간 실존의 확장이 아니라, 구속받은 사람들이 사랑의 하나님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공유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된다.(276)
29. 예배
예배에 참여한다는 것은 거룩한 장소(출 3:5), 즉 엄밀하게 말해서 인간이 서 있을 권리를 갖지 못한 곳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278)
30. 성찬식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성찬식에 대해서 “천국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존 웨슬리는 이것을 “천국의 보증”이라고 불렀다. ... 우리가 지금 주의 만찬을 집행하는 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기하는 동시에 미래에 일어날 일(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 영접을 받으며 받아들여짐)을 확증하는 것이다.(282)
31. 영국의 대표적 복음주의 설교자이자 신학자인 존 스토트 목사의 강연 중 한 예화. 몇 년 전 나는 길거리에서 5달러 지폐를 주운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는 그 지폐를 주운 날부터 시작해서 길을 걸을 때 결코 눈을 들지 않았으며, 그 결과 수년이 지난 후 그에게는 29,516개의 단추와 54,172개의 바늘, 1센트 동전 12개, 구부러진 등, 인색한 성격만 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잃어버린 것을 한번 생각해 보라. 그는 눈부신 햇살과 빛나는 별, 친구들의 얼굴에 가득한 미소, 봄에 핀 꽃을 볼 수 없었다. 그의 눈은 그저 길가 하수구만 향하고 있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도 이 젊은이와 같이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일들에 파묻혀서 정작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289)
32. 천국에서 성도들이 보게 될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교황 요한 22세의 주장.
지금 제단 아래(계 6:9)에 있는 성도들은 (제단 위에 있는 성도들과 달리) 그리스도의 인성을 묵상하는 가운데 위로를 발견할 수 있으며, 부활과 최후 심판 이후에 하나님을 직접 보는 충만하고 완전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말은 제단 위에 있는 성도들을 별도로 취급한다. 즉 이미 정화된 사람들은 종말 이전에도 하나님을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충만하게 보기 위해서는 역사의 종말이 도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302)
(* 성도들 사이에도 제단 위에 있는 성도와 아래에 있는 성도 사이에 하나님을 보는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죽은 자들의 부활의 시기와 연관한 나의 주장과 원리적으로 같다.) 끝. (070119-19102)